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정치 인생 전반기를 '야당 투사'로서 보냈다면, 후반기에는 대한민국 보수 정당을 대표하는 대통령과 정치인으로서 활동했다. 그가 1993년 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이름 붙여진 '문민(文民)정부'는 민주화 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말처럼 쓰여졌었다.

◇3당 합당 통해 집권 성공
김 전 대통령은 젊은 시절 내내 군사 정권과 싸워 왔었다. 그런 그가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과 정치적으로 손을 잡는 결단을 내렸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에도 밀려 제3당으로 내려앉은 뒤 정치적 반전을 시도한 것이다. 당시 그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이른바 '3당 합당'이었다.

집권 여당의 대표가 된 김 전 대통령은 당 내부에서 자신의 세력을 차분히 키워가면서 군사정권 세력이 중심이던 '민정계'를 압박했다. 민정계에서는 "3당 합당의 전제 조건을 YS가 깨려 한다"며 '내각제 합의 문서'를 공개하기도 했지만, 민심을 등에 업은 YS는 92년 민자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종찬 후보를 꺾고 12월 대선에 나섰다. 그리고 평생의 숙적인 DJ와 경제 신화의 주인공 정주영 후보와 맞붙은 3파전에서 DJ를 193만표차로 꺾고 대통령이 된다.

김영삼 민자당후보가 1992년 12월19일 이른 새벽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될 무렵, 중앙당사에 들러 박수로 환호하는 당직자와 사무처요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하고 있다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등 연이은 개혁

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YS는 자신이 취임사 때 약속했던 '변화와 개혁'을 처음부터 강하게 밀어붙였다. 취임 당일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개방하는 조치를 시작으로 이틀 뒤인 27일에는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17억7822만원)을 전격 공개했고 "이것은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며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를 추진했다.

곧이어 청와대와 당·내각을 자신의 사람들을 채운 뒤 취임 1주일이 지나서는 '금융실명제' 계획도 발표했다. 그리고 3월6일에는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 등 군부의 핵심인 하나회 세력을 일거에 축출하는 인사를 단행한다. 당시만 해도 '군부 쿠데타'를 걱정하던 시대였다. 국방부를 비롯해 전 정부가 보름동안 밤샘 비상 대기를 하며 군부 동향을 살폈다.

YS는 이후에 "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문민화'를 자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치기도 했다. YS의 재임 초기 개혁 조치는 그 이후로도 부동산 거래 실명제, 지방자치 선거 실시 등으로 이어지면서 취임 초 국정지지도가 90%를 넘어서는 등 국민적 인기가 크게 올라갔다.

임기 중반인 95년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을 세상에 드러내고 곧이어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이어가면서 전직 대통령 두 명을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명분으로 모두 구속시켰다. 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1980년 쿠데타에 가담했던 신군부 인사들을 검찰이 기소하지 않자,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해서 결국 전원을 법정에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는 3당 합당에서 시작됐던 군사정권과의 관계를 끊기 위해 96년 2월에 '신한국당'을 창당했다. 경복궁 앞에 일제가 세웠던 조선총독부(중앙청) 건물을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명분을 앞세워 허물기도 했다.

◇북한 문제와 임기말 IMF

내정에서는 연이은 개혁 조치로 국민들의 지지를 끌어냈지만 대외 문제는 그리 잘 풀리지 않았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YS를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라고 하면서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하기도 했지만, 이후 북한 핵 문제가 터지면서 한미관계가 삐걱댔다. 클린턴은 북한과 직접 대화를 통해 핵 문제를 풀려고 했고, YS는 "핵을 가진 집단과 대화할 수 없다"고 했다.

93년 취임 초 YS는 김일성과 남북정상회담을 약속하고, 남북고위급 회담과 적십자회담을 통해 이를 준비했다. 그러나 회담을 목전에 두고 1994년 7월에 김일성이 갑자기 죽으면서 남북관계는 임기 내내 풀리지 않았다. 94년 북핵 위기가 고조되면서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는 상황도 연출됐고, 96년에는 강릉 무장공비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면서 한일관계도 갈수록 악화돼, YS가 일본을 향해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하기도 했다.

임기 4년차인 96년까지만 해도 비교적 탄탄하게 정권을 유지했던 YS는 96년 12월 안기부법과 노동법 '날치기' 사건을 계기로 급격히 인기가 떨어졌다. 곧이어 97년 초 아들 김현철씨가 구속되면서 YS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쇠락했다. 경제적으로도 기아차 사태 등 대기업 연쇄 부도가 이어지면서 결국 11월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국가부도 상태에서 김영삼 정부는 막을 내리게 됐고, 자신의 평생 정적이던 DJ가 후임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1996년 회동을 갖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퇴임 후에도 영향력 상당

YS는 98년 2월 퇴임한 뒤 그가 오랫동안 살았던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줄곧 지냈다. 비록 'IMF 대통령'이라는 라는 족쇄가 있었지만 '민주화의 대부'라는 상징성이 있었고, 정치적 식솔들인 상도동계 정치인들이 여전히 중요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이후로도 상당히 이어졌다. 퇴임 직후에는 자유북한방송 방송위원회 명예위원장, 일본 와세다대 특명교수 등으로 대외 활동도 자주 했다. 그러던 중 99년 6월 김포공항에서 얼굴에 달걀을 맞는 '테러'를 당하고, "독재자는 눈을 노린다"는 말을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뒤에는 한동안 구심점이 없던 보수 정치권의 중심 역할을 잠시 하기도 했다. 2007년 대선 때는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을 지원, 한나라당 경선과 대선에서 승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박근혜 현 대통령에 대해선 줄곧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왔으나 2012년 대선을 앞두고는 "힘을 모아야 한다"며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선언, 보수 진영을 결집시키는데 도움을 줬다. 2012년 대선 전 부터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스탠트 수술을 받기도 했던 그에 대해 옛 상도동계 출신 관계자들은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 것을 본 뒤 이젠 자신이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갑자기 기력이 크게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