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편에서 계속>
정약용을 계기로 초의선사와 금란지교를 맺은 추사
추사가 서른살 되던 1815년, 그는 동갑 초의선사와 금난지교(金蘭之交)같은 관계를 맺습니다. 초의선사에 대해 알아보고 갑니다. 1786년(정조 10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초의선사의 속성은 장씨로 15살 때 큰 위기를 맞습니다. 강변에서 놀다 그만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 했는데 마침 지나가던 스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이지요. 스님은 장씨 소년에게 출가를 권했고, 소년은 1년 뒤인 16세 때 남평 운흥사에서 민성스님을 스승으로 삼아 스님의 삶을 시작합니다.
초의선사는 19살 때 영암 월출산에서 득도를 했다고 하지요.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뒤부터는 전국을 돌며 선지식을 키웠습니다. 마침내 대흥사의 13대 대종사가 됐는데 대종사는 한마디로 불가의 큰어른을 말합니다. 초의선사의 관심분야는 매우 폭이 넓었다고 합니다. 한낱 학승(學僧)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가 추사를 알게된 것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아들 정학연의 소개 때문이라고 합니다. 강진에서 17년간 귀양살이한 다산을 아들 정학연은 자주 찾아뵈었지요. 그때 정학연은 대흥사의 초의선사를 알게됐고 그의 지식에 감동한 나머지 “한양에 올라가면 여러 명사들을 소개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어느날 초의선사가 한양으로 와 정학연을 만나자, 정학연은 어렸을 적부터 재주를 보인 추사를 불렀다는 겁니다.
물론 두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설(異說)도 있습니다. 초의선사가 한때 수락산 학림암에서 해붕선사를 모시고 있을 때 추사가 해붕선사를 찾아왔고 이때 초의선사와도 인사를 했다는 것입니다만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여기서 ‘문갑식의 기인이사’ 16편에 썼던 ‘정약용과 유일-혜장-초의선사’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산은 기나긴 강진에서의 유배기간동안 유일-혜장스님이라는 당대의 고승들과 교유했고 김정희와 초의선사는 이 정약용을 매개로 만나게된 것입니다.
추사와 초의선사의 관계는 잘 규명돼 있는데 여기서는 추사가 마흔살 때 제주도로 유배당하면서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는 것으로 둘의 관계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외로운 유배시절, 추사가 초의선사가 보내준 차로 시름을 달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햇차를 몇 편이나 만들었습니까. 잘 보관하였다가 내게도 보내주시겠지요. 자흔과 향훈스님들이 만든 차도 빠른 인편에 부쳐 주십시오. 혹 스님 한 분을 정해 (그에게 차를) 보내신다 해도 불가한 일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세신도 편안한가요. 늘 염려됩니다. 단오절 부채(節萐)를 보내니 나누어 곁에 두세요."
"갑자기 돌아오는 인편으로부터 편지와 차포를 받았습니다. 차 향기를 맡으니 곧 눈이 떠지는 것만 같습니다. 편지의 유무(有無)는 원래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나는 차를 마시지 못해 병이 났습니다. 지금 다시 차를 보고 나아졌으니 우스운 일입니다."
여기서 ‘편지의 유무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말은 뭘까요? 추사는 편지를 즐겨썼지만 초의선사는 답장을 잘 안보냈다고 하는군요. 아마 그것을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한가지 주목할 부분은 ‘인편으로부터 편지와 차포를 받았다’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인편(人便)은 차 배달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소치 허련이 바로 초의선사의 분부를 받고 추사에게 차를 심부름하는 역할을 자주 맡았지요. 그렇다면 소치 허련은 무슨 연유로 초의선사와 인연을 맺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09년 태어난 허련은 교산 허균의 집안이었다고 하지요. 허균의 후예중 진도에 정착한 이가 허대(許岱)인데 그는 임해군의 처조카였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임해군이 역모죄로 몰려 진도로 귀양오자 수행한 허대가 아예 눌러앉은 것입니다. 진도라는 당시로는 외딴 섬에서 그림을 그리던 허련의 정열을 맨처음 알아본 이는 숙부였다고 하지요. 그는 “내 조카는 반드시 그림으로 일가(一家)를 이룰 것”이라며 어렵게 오륜행실도를 구해줬고 허련은 그것은 모방하며 실력을 키웠다고 합니다.
허련이 초의선사를 알게된 것은 1835년 무렵입니다. 초의선사는 ‘호남팔고(湖南八高)’라고 칭송받았는데 ‘다산도(茶山圖)’ ‘백운동도(白雲洞圖)’같은 그림을 보면 초의선사가 불법뿐 아니라 시서화에도 조예가 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초의선사는 허련에게 단비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가 남긴 ‘몽연록(夢緣錄)’이라는 책을 보면 허련이 얼마나 초의선사에게 감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초의선사는 나를 따뜻하게 대접해 주었고 방을 빌려주며 거처하도록 해 주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지요. 허련의 재주를 알아본 초의선사는 대흥사 한산전에 머물며 불화를 가르치는 한편 녹우당의 해남 윤씨에게 부탁해 허련이 공재 윤두서 선생의 그림을 열람하도록 했습니다.
이 모든게 허련을 위한 배려였지요. 허련은 “공재 선생의 그림을 열람한 뒤 수일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초의선사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다산의 문하에서 해남 윤씨 후손인 윤종민, 윤종영, 윤종심, 윤종삼 등과 동문수학했기 때문이지요.
다시 ‘몽연록’을 살펴볼까요?
“아주 어릴 적에 초의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멀리 돌아다닐 생각을 하였으며 지금까지 이처럼 홀로 담담하고 고요하게 살았겠는가. 선사와 수년을 왕래하다 보니 기질과 취미가 동일하여 노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초의선사는 이제 허련을 추사에게 소개합니다. 1838년 8월무렵 금강산 유람을 떠난 초의선사는 허련의 그림을 추사에게 보여주지요. 허련의 그림을 본 추사는 대번에 “압록강 이동에 소치만한 화가가 없다”고 격찬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허군의 그림 격조는 거듭 볼수록 더욱 묘해 이미 격을 이루었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보고 들은 것이 좁아 그 좋은 솜씨를 마음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있으니 빨리 한양으로 올라와 안목을 넓히는 것이 어떨지요?" 자기 문하로 들어오라는 거지요. 초의선사는 이 소식을 허련에게 전했고 기별을 받은 허련은 이십일을 걸어 추사를 만납니다. 소치는 당시를 "초의선사가 전하는 편지를 올리고 곧 추사선생에게 인사를 드렸다. 처음 만나는 자리였지만 마치 옛날부터 서로 아는 것처럼 느꼈다. 추사 선생의 위대한 덕화가 사람을 감싸는 듯했다"고 기억하고 있지요.<下편에 계속>
Photo by 이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