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에 직장을 둔 회사원 배모(31)씨는 최근 팀 회식 자리에서 머쓱한 경험을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고 술잔이 오가던 때였다. 그가 "임신 3개월차 와이프가 매일같이 짜증을 부려 요즘 너무 힘들다"면서 고충을 얘기했다. 그러자 회식 자리가 일순 고요해졌다. 주변 동료들이 서둘러 최근 회사 인사(人事) 얘기를 꺼내면서 화제를 돌리려 할 때도 배씨는 그 '적막'의 이유를 몰랐다.
그 이유는 회식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선배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알게 됐다. '○○○ 팀장님 불임이라 애 없이 와이프랑 둘이 살잖아. 너 임신 얘기 꺼내는데 아깐 진짜 당황했다. 야;;'
나이가 40대 초반인 A팀장이 결혼 후 10년이 다 되도록 시험관 시술로도 아이를 못 얻었고, 난임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얘기였다. 배씨는 "지금이라도 알아서 천만다행"이라며 "팀장님에게 아이가 몇 살인지, 초등학교는 들어갔는지 물었다면 분위기도 망치고 팀장님에게도 큰 실례가 될 뻔 했다"고 말했다.
최근 30∼40대 직장인들 사이에선 이처럼 임신, 출산 관련 단어가 '금기어'처럼 조심스러운 말이 됐다. 난임이 워낙 많다보니 별 생각 없이 아이 얘기를 꺼냈다가 의도치 않게 직장 상사나 동료가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난임(불임)은 피임을 하지 않은 상태로 1년 이상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는데도 임신이 안 되는 경우를 말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난임 환자 수는 2006년 17만8000여명에서 지난해 21만5000여명으로 8년만에 20% 넘게 늘었다.
올 연말 아내의 출산을 앞둔 회사원 한모(33)씨는 "요즘 물어보면 팀마다 (난임이) 1∼2명씩은 꼭 있다"면서 "회식 때 임신·출산 얘기야 조심하면 되지만, 난임으로 고생하는 상사에게 '임신한 아내 때문에 회식을 빠지겠다'는 얘기도 못 꺼내는 상황"이라고 했다. 육아 휴직은 언감생심 꿈도 꿔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남자들도 출산 휴가에 육아 휴직 쓰는 시대라지만, '회사 생활 잘 한다'는 소리 들으려면 아이도 조용히 낳아야 한다는 게 선배들 얘기"라고도 했다.
팀원들에 대한 '정보 공유'가 비교적 잘 되고 회식 자리도 적은 여성 직장인들 또한 고충이 많다. 서울의 한 은행 지점에서 일하는 남모(여·31)씨는 남편 만류에도 임신 6개월차인 지금까지 출근을 계속하고 있다. 남씨는 "임신했다고 늦게 출근하거나 몸이 안 좋은 티라도 냈다간 상사들 눈밖에 나기 십상이고, 마침 불임 때문에 힘들어하는 상사도 있어 임신, 출산에 관한 얘기는 동료들과 점심 시간에 나누거나 메시지로 주고받는다"고 했다. 아이 둘을 둔 '워킹맘'인 40대 김모씨도 "시험관 수정을 시도 중인 동료에게 미안해서 아이 유치원 행사 때문에 연차를 낼 때도 시아버님이 수술을 받으신다고 둘러댄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 난임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들 중 일부는 "동료들의 이런 배려가 오히려 더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고도 말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다른 이들이 불편해지는 건 원치 않고, 자신을 동정하는 듯한 시선 또한 민망하다는 것이다. 회사원 최모씨는 "동료들이 임신이나 출산 관련 얘기를 눈치껏 조심하는 경우가 있는데, 내 눈엔 티가 안 날 수 없다"면서 "괜히 미안해하기보다 여럿이 모인 차리에선 차라리 나를 의식하지 말고 서로들 편하게 얘기 나누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입력 2015.10.08.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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