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터진 지 꼭 36년 되던 1986년 6월 25일, 서울 시내 모든 우체통 주변에 경찰관들이 쫙 깔렸다. 일부 대학생들이 중·고생들에게 "6·25 때 미국이 동포를 죽였다"는 식의 내용을 담은 '의식화 편지 보내기 운동'을 벌이자 이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조선일보 1986년 6월 26일 자). 1958년 12월에도 광화문 우체국에서 '불온서신'이 발견돼 시내 상당수 우체통에서 형사들이 덜덜 떨며 잠복근무를 했다. 우체통은 이처럼 여러 선전물을 몰래 뿌리려는 사람들도 '애용'했다. 1992년 총선을 앞두고 안기부 직원들이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유인물 400여장을 집어넣은 곳도 거리의 우체통들이었다. 미혼모의 아기를 받는 '베이비 박스'처럼, 우체통은 그 누구와도 대면하지 않고 편지를 살짝 발송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올해로 이 땅에 등장한 지 꼭 120년 된 우체통이 전달해 온 건 편지만이 아니다. 많은 절도범이 훔친 지갑에서 돈을 빼내곤 신분증은 꼭 우체통에 넣었다. 도둑놈 가슴 속 일말의 양심 때문에 돌려준 것인지, 쓰레기통에 잘못 버렸다가 경찰 추적을 받을까 봐 조용히 우체통에 넣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1992년 9월 민자당 서울지부 금고에 있던 현금과 수표 4억4000만원을 훔쳐간 범인은 범행 1주일 만에 3억6900만원이 든 봉투를 종로의 우체통에 넣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발송자의 얼굴은 꼭꼭 숨긴 채 확실하게 보내는 통로가 우체통이었다.
손가락 온기가 묻은 편지를 전해 주던 우체통은 SNS 시대를 맞아 숫자가 격감하고 있다. 1991년엔 전국 5만5400개였으나 2010년 2만2051개, 2014년 말엔 1만5681개로 집계됐다. 당국은 3개월간 한 통 이상의 우편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철거한다. '살아남아 있을 날짜를 목에 걸고 있는 유기견 같은 운명(김창완)'이다. 하지만 새로 생기는 우체통도 있다. 지난 4월엔 세종시에 신형 우체통이 여러 곳에 설치됐다. 지방 관광지에는 엽서를 넣으면 6개월이나 1년 뒤 배달해 주는 '느린 우체통'이 늘고 있다. 어느 화가는 "이용자가 없어 우체통이 사라지지 않도록 길에서 우체통을 보면 저에게 편지해 주세요"라는 운동을 벌인다. 그는 아버지 없이 자란 어린 시절, 외로울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부치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던 사람이다. 공중전화 부스 철거에 비해 우체통 철거를 보는 시선에는 아쉬움이 더 진하다. 온갖 사연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여 전해 주던 '빨간 메신저'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 많은 이들 마음속에 아직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