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비 기자

올해로 서른인 마누엘은 열 살 때부터 필리핀 몬탈반의 '쓰레기산(山)'에서 쓰레기를 주웠다. 쓰레기 더미에 올라 플라스틱이나 철 등 돈 될 만한 물건 골라내는 게 일과였다. 몬탈반은 필리핀 정부가 1999년 도시 빈민 9000여 가구를 강제 이주시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 입구엔 산을 깎아 쓰레기를 채운 매립장이 있다. 마누엘은 "먹고살 길이 없는 마을 사람들에게 '쓰레기'는 유일한 소득원이었다"고 했다.

마누엘의 인생을 바꾼 것은 플래카드 한 장이었다. 한국의 국제 구호단체인 기아대책(KFHI)은 작년 몬탈반에 직업훈련원을 열고 마을 곳곳에 '무료 직업교육'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용접·경비·미용 기술을 6개월~1년간 공짜로 가르치고 필리핀 교육부(TESDA), 필리핀 국립 경찰(PNP)과 연계해 국가 공인 자격증을 발급해준다. 용접 기술을 배우고 있는 마누엘은 "한국 조선소에 취업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이 사업을 지원한다.

지난달 5일 필리핀 몬탈반에 있는 직업훈련원 건물 앞 마당에서 경비원을 꿈꾸는 교육생들이 훈련받고 있다. 매일 새벽 체력 단련부터 실탄 사격까지 강도 높은 경비훈련을 마치면 필리핀 국립경찰(PNP)이 공인하는 자격증이 나오고, 취업의 문도 열린다. 작년 1월 개원한 직업훈련원은 경비·용접·미용 분야에서 3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작년 초 교육을 시작한 직업훈련원에서 지금까지 300여 졸업생이 나왔다. 졸업생 대다수가 필리핀 최대 쇼핑몰인 에스엠(SM) 경비직, 조선소 용접공으로 취업했다. 직업훈련원의 인기는 1년 만에 폭발적으로 높아져 경쟁률이 4대1까지 치솟았다.

세칠리오 에르난데스 몬탈반 시장은 "직업훈련원이 생긴 뒤로 마을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고 했다. 다닥다닥 붙은 단층짜리 벽돌집에 2층을 올리는 집이 한두 가구씩 늘었다. 직업훈련원 일을 총괄하고 있는 이인로(60) 기아봉사단원은 "대도시로 취업한 졸업생들이 돈을 부쳐오면서 마을에 여유가 생겼다"고 했다.

지난달 7일 찾은 직업훈련원은 축제 분위기였다. 이날 졸업생 141명이 새로 배출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린 다나오 모레노 대통령 비서관, 마담 루치아 몬탈반시 관광청장 등 정부 관계자 10여 명이 참석해 졸업을 축하했다.

이날 졸업생들의 눈이 유난히 빛났던 때가 있었다. 졸업생들 사이에서 '최고 직장'으로 꼽히는 한진중공업 수비크 조선소에 취직한 선배의 축사가 있을 때였다. 한진중공업은 2009년 필리핀 수비크만(灣)에 약 92만평 규모의 초대형 조선소를 완공했다. 얼반(26)은 한진 유니폼을 아래위로 갖춰 입고 졸업식에 왔다. 소피텔 호텔에서 접시닦이로 한 달에 5000페소(약 13만원)를 받고 일하던 그는 이제 용접공으로 한 달에 1만8000페소(약 46만원)를 번다고 했다. 얼반은 후배들에게 말했다. "저도 언젠가는 한진처럼 큰 조선소를 세워 필리핀 국민을 먹여 살리는 게 목표입니다. 그전까지는 이를 악물고 기술을 배워 가난을 이겨냅시다." 졸업생들 사이에서 뜨거운 박수가 터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