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맞아, 삼삼오오 한복을 입고 성묘를 가는 정겨운 풍경이 펼쳐진다. 평면으로 우주를 품는다,는 우리 옷 한복. 일상에서는 멀어졌지만, 명절이나 결혼식 등 중요한 의례가 있을 때는 깊이 있는 오방색과 단아한 기품으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한다.

대한민국에서 한복을 가장 자주 입는 사람 중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대통령은 곧은 등과 단아한 어깨선, 풍성하게 부풀린 우아한 헤어 스타일로 한복을 잘 소화하는 한복계의 ‘슈퍼 모델’로 알려져 있다. 박대통령은 취임 이후부터 한 디자이너가 만든 한복을 입는다.

왼쪽부터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만찬 한복 2012, 한미동맹 60주년 기념 만찬 한복 2013, 숭례문 복구 기념식 한복 2013

2013년 대통령이 된 이후 공식석상에서 입은 한복은 모두 김영석 디자이너의 것이다. 김영석은 박대통령의 ‘한복 외교’는 모델이 좋아서 얻는 효과가 크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목선이 굉장히 긴 편예요. 사실 목이 길다는 것은 한복에서는 핸디캡이거든요. 그런데 어머니인 육여사가 일상에서 한복을 입고 생활하던 모습을 오래 보아오셨기 때문에, 그 핸디캡을 청초하고 고아한 자세로 승화시키셨어요.”

2012년 말, 취임식을 앞두고 청와대에서 김영석에게 한복을 의뢰했을 때는, 한복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함구했다고 한다. 입을 이의 샘플 옷을 받아들었을 때, 체격을 가늠해보며 ‘혹시나 대통령이 아닐까’하는 생각은 했다. “그 전부터 간간이 이명박 전 대통령과 재벌가의 한복을 만들어오던 터라, 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올 지 모른다고 상상은 했어요. 제 한복을 입은 모습은 TV 를 통해 처음 뵈었지요.”

취임식을 위해 그가 만든 한복은 두 벌이다. 빨간색에 검정색을 더해 깊이감 있는 붉은 빛을 띠는 한복과 청색에 검정색을 섞어 밀도가 높은 푸른 빛을 띠는 한복. 각 한복은 한 벌에 160만원 정도. 자수 등 공이 많이 들어간 이후의 다른 한복들은 그것보다 좀더 가격대가 올라가기도 했다.

“대통령이 입으신 한복 중에 가장 아름다웠던 건 버킹엄 궁에서 열린 영국 여왕 국빈 만찬을 위해, 지어드린 거예요. 오렌지색 저고리에 은빛 자수가 놓인 흰색 치마를 해드렸는데, 화려한 액세서리를 한 영국 여왕 옆에서도 은은하게 빛이 났어요.”

디자이너 김영석이 박대통령의 한복을 지을 때 가장 신경을 쓰는 지점은 그 옷을 입고 어디에 가는가,이다. 한복이 단순히 공식 의전 드레스가 아니라, 그 나라 사람들과 외교적인 화합을 이루는 문화 사절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상대방 나라에서 좋아하는 색깔이나 문양을 넣으려고 해요. 한복으로 먼저 말을 건네는 거죠.”

2014년 9월 21일. 캐나다 동포 만찬 간담회.

박대통령의 한복은 한국과 외국에서 동시에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박 대통령의 한복은 현재 서울과 파리 두 도시에서 전시되어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 9월 23일, 파리 루브르 박물관 옆 국립장식미술관에서 한국과 프랑스의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한국문화전 ‘코리아 나우!’행사의 일부인 ‘한국 의복 속 오방색’ 섹션에 박대통령의 취임식 한복과 영국 여왕 국빈 만찬에서 입었던 한복이 나란히 전시됐다.

2014년 1월 16일 인도 대통령 주최 국빈 만찬. 상대국 귀빈의 보라색 터번과 박대통령의 노랑 저고리의 보라색 고름이 잘 어울린다.

파리에 전시된 한복은 실물이 아닌 재현이지만, 푸른 눈의 서양인들은 미니멀하면서 컬러가 오묘한 대통령의 한복 앞에서 자리를 뜰 줄 모른다고 전해진다. 내년 1월 3일까지 이어지는 파리의 한국특별전 패션전에는 이영희, 이혜순, 김영석, 김혜순 등 한복 디자이너와 진태옥, 이상봉 등 패션 디자이너 총 24명이 참여해 총 270여 점의 한국 의복이 소개된다.

9월 15일부터 청와대 사랑채에서 ‘광복 70주년 기념 한복특별전-한복, 우리가 사랑한’이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전시에도 박대통령이 입었던 한복 세 벌이 전시되어 있다. 취임식 만찬 한복과, 한미동맹 60주년 만찬 한복, 숭례문 복구 기념식 한복 등을 포함한 전시는 11월 1일까지 이어진다.

2014년 1월 20일. 스위스 방문 국빈 만찬. 스위스 사람들이 좋아하는 화이트와 레드를 섞은 강렬한 한복을 입었다.

특히 청와대 사랑채에서 열리는 한복 전시는 박대통령의 한복 외에도 해방 이후 70년간 한복의 흐름을 ‘미스코리아와 한복’ ‘한류 드라마 속의 한복’ 등 흥미로운 섹션과 복식사적으로 의미있는 88 점의 작품을 통해 흥미롭게 구성했다.

한복 디자이너 이리자 여사가 육영수 여사를 위해 만들었던 붉은색 공단 두루마기. 동정을 없애 모던한 느낌을 준다.

전시회를 기획한 서봉하 예술감독은 “현재 일상에서 지위를 잃어가는 한복의 역사성을 찾아서 보여주면서 우리 옷의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전시회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의 옷이다.

두루마기 섹션에서 한복 디자이너 이리자 여사가 육영수 여사를 위해 지은 붉은색 공단 두루마기는 동정도 고름도 없앤 심플한 구조로 아방가르드한 코트를 연상시킨다.

왼쪽부터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이 입었던 흰색 모시 두루마기. 프란체스카 여사가 입었던 양단 두루마기.

이승만 대통령은 흰색 두루마기를 즐겨입었다고 한다.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에서 서명할 때 입었던 모시 두루마기는 고름을 없애고 두 개의 버튼을 달아 여밈을 대신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도 여러 벌의 한복을 유물로 남길 정도로 한복을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광복 이후 초대 대통령 부부의 한복은 소색과 옥색으로 그 빛깔의 은은함이 달빛을 닮았다.

1978년 무역박람회. 포니자동차 옆의 한복 입은 모델.

한복을 일상복으로 즐겨입었던 1970년대 서민들의 생활을 담은 기록 사진도 매우 흥미롭다. 신차를 발표하는 자동차 발표회장, 최신식 포니 옆에는 몸의 라인이 드러난 섹시한 미니원피스 대신 길고 풍성한 한복을 입은 모델이 수줍게 서 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부부가 김포 공항에서 카트에 잔뜩 짐을 싣고 걸어가는 뒷모습도 흥미롭다. 언뜻 전쟁통에 리어카에 밥솥을 싣고 걸어가는 피난민을 연상시키지만, 자세히 보면 한복을 입은 신부와 양복을 입은 신랑의 활기찬 모습에 미소를 짓게 된다.

1971년 김포 공항 택시 승차장. 막 신혼 여행을 다녀온 부부.

1970년 막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는 코로나 승용차와 그 옆을 지나가는 할아버지 사진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에게서 자동차쯤이야 문제없다는 식의 강렬한 배포가 느껴진다.

1970년 막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는 코로나 승용차와 그 옆을 걸어가는 할아버지.

나일론이 등장하면서 서민들도 손쉽게 한복을 지어입으면서 패션스타일을 뽐냈다.
광복 이후 수입된 모든 서양 원단들이 화려한 맵시를 뽐내는 저고리 코너에서는 아일렛, 불란서망사, 인조견 등으로 만든 최신식 한복 저고리가 '날 좀 봐주세요' 라고 유혹한다.
양단, 홍콩 양단, 벨벳, 오팔, 불란서 망사 등 다양한 소재로 멋스러운 한복을 지어입던 중산층의 풍습은 박완서의 소설에도 잘 드러나 있다.

다양한 소재의 옷감으로 만든 한복 저고리.

한복진흥센터가 한복의 70년사를 되돌아본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이번 전시에서 가장 모던한 풍경은 젊은 디자이너들의 신한복 코너다. V 네크라인과 풍성한 치마 주름, 끈으로 표현되는 몇 가지 특징만 살린 채 과감하게 변형시킨 신한복을 보면 한복이 과거의 옷이 아니라 당대의 트렌드와도 소통할 수 있는 현재의 옷이라는 가능성이 느껴진다.

젊은 디자이너들이 변형시킨 신한복.

이밖에 한복을 파리프레타 포르테 무대에 최초로 진출시킨 디자이너 이영희의 40주년 기념회고전 ‘바람, 바램’ 전도 동대문 DDP에서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 10월 9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에서는 ‘바람의 옷’이라고 명명된 한복의 아름다움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클라이맥스는 플래티넘 드레스라고 명명된 재료비만 50억이 넘는 백금 드레스와 이영희의 손주 며느리인 전지현이 결혼식 2부에 입었던 한복 드레스다.

디자이너 이영희가 만든 재료비만 50억이 넘는 백금 드레스.

디자이너 이영희는 일본의 기모노처럼 럭셔리의 끝을 보여주는 최고급 드레스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으로 백금으로 짠 플래티넘 드레스를 고안했다. 실제 현장에서 보면 한복 드레스에서 뿜어나오는 은은한 광채가 전시장 전체를 밝히는 느낌이다. 이 50억이 넘는 드레스는 1997년 ‘보그코리아’ 창간호 화보를 위해 톱모델 린다 에반젤리스타가 입었었다.

바람의 옷이라고 명명된 한복디자이너 이영희의 40주년 기념전.

160만원 상당의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 한복부터, 50억이 넘는 플래티넘 한복 드레스까지 이 가을, 한껏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한복이 일상의 예술로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