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악의 공연장 화재 참사가 1972년 연말 일어났다. 12월 2일 저녁 서울 세종로의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자리)에서 '10대 가수 청백전' 공연 중 조명 장치 과열로 불이 나서 53명이 사망하고 76명이 중상을 입었다. 가수 문주란·김상희·하춘화도 다쳤다. 원인은 어처구니없게도 건물 한구석 벽에 붙은, 이른바 '두꺼비집'을 잘못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공연 중 흐른 과(過)전류 때문에 두꺼비집의 퓨즈가 녹아내려 전기가 끊기자 이를 귀찮게 여긴 직원이 퓨즈 대신 철사로 연결해 놓는 바람에 과전류가 무방비로 흘렀던 것이다(조선일보 1972년 12월 5일자).

퓨즈 교체 때마다 남편의 능력을 요구했던 1970년대 가정용‘두꺼비집(위 사진)’과 간편해진 오늘날의 아파트 누전 차단기.

이 땅에 전기가 들어온 이래 1970년대 말까지 모든 집마다 대문 부근 벽 위쪽에 두꺼비집이 붙어 있었다. 전기가 가정집에 들어오는 첫 관문을 지키는 개폐(開閉) 스위치와 과전류를 차단하는 퓨즈가 설치된 배전(配電) 박스였다. 큼직한 스위치 모양이 엎드린 두꺼비 등 같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 우리 민속에서 두꺼비는 복을 가져다 준다는 존재이니 이름의 인상은 친근하다. 하지만 '두꺼비집'은 잘못 건드리면 온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참화를 부를 수 있는 아킬레스건 같은 급소였다.

오늘날 두꺼비집 대신 쓰는 누전차단기는 집 안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반면 정전(停電)이 잦던 예전엔 전기가 나갈 때마다 두꺼비집부터 열어보는 게 상식이었다. 전류가 너무 많이 흘러 정전됐다면 끊어진 퓨즈를 교체해야 했는데 이게 간단하지 않았다. 퓨즈를 갈다가 감전사한 경우도 있었다. 남자가 해야 할 집안일 중 '벽에 못 박기'나 '형광등 교체' 따위에 비해 난도가 훨씬 높은 작업이었다. 물론 남편 몫이었다. 겁이 나서 두꺼비집을 열어볼 엄두도 못 내는 남자도 있었지만 신문은 '정전만 되면 두꺼비집도 안 열어보고 전기회사에 연락부터 하는 건 반(反)과학적 생활 방식'이라고 꾸짖었다.

1968년 숙명여대가 전교생 2300여명을 대상으로 '여대생들, 집안일 어디까지 할수 있나'를 조사할 때 물어본 세 가지 집안일은 '간장·된장 담그기' '재봉틀 바느질' '두꺼비집 퓨즈 교체'였다. 여대생 20%가 "퓨즈를 교체할 수 있다"고 답했다. 남녀 할 것 없이 웬만한 집안일은 직접 했던 DIY(Do It Yourself) 시대의 모습이다.

누전차단기 시대인 오늘날 남편들의 퓨즈 교체 부담은 없다. 집 안 안전을 몸으로 감당하던 막중한 남자의 일 한 가지도 사라졌다. 이제 남자가 하는 집안일은 대개 '음식 쓰레기 버리기'같은 단순 노동이다. 남편이 맡는 숙련 가사 노동은 '명절에 전 부치기' 정도만 남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