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선 법관의 노력이 사법 신뢰를 높이는 지름길입니다.”

민일영 대법관이 16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2층 중앙홀에서 퇴임사를 밝히고 있다.

16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2층 중앙 홀에서 민일영(60·사법연수원10기) 대법관의 퇴임식이 열렸다. ‘사법 불신(不信)’을 고민하는 현실의 무게 때문이었을까? 32년 간의 법관 생활을 마감하는 사법부 최고 어른의 퇴임식 분위기는 다소 무겁고 엄숙했다.

오전 11시 정각. 옅은 미소를 머금은 민 대법관의 입장과 함께 퇴임식이 시작됐다. 민 대법관의 부인 박선영 전 자유선진당 의원도 남편 옆자리에 앉았다.

"최근 사법부를 향한 국민의 신뢰도를 둘러 싸고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사법부가 처한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으로 시작된 민 대법관의 퇴임사는 "사법에 대한 신뢰를 높이려면 사법부 종사자 뿐 아니라 정치권을 비롯한 모든 국민이 함께 노력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일선 법관이 당사자 말에 귀를 기울이고, 올바른 결론을 내린 뒤 판결을 선고해 당사자를 승복하게 하는 것이 지름길"이란 애정 어린 충고로 이어졌다.

민 대법관은 “법관은 당사자가 법정에 섰을 때 느끼는 엄숙함, 재판장을 마주했을 때의 온화함, 논리정연한 진행 뒤에 내리는 합리적 결론, 이 세가지 덕목을 갖춰야 한다”며 “선배에겐 편안함, 동료에게는 믿음, 후배에게는 본보기가 될 수 있는 법관이 되어달라”고 당부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대법원 중앙 홀의 높은 천장을 타고 조용히 울려 퍼졌다.

퇴임식에 참석한 양승태(67·2기)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 13명, 서울고법, 중앙지법원장 등 서울지역 각급 법원장의 얼굴에도 고민의 그림자가 가득했다.

민일영 대법관의 부인 박선영 전 자유선진당 의원(오른쪽)이 16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2층 중앙홀에서 열린 민 대법관의 퇴임식에 참석해 나란히 앉아있다.

민 대법관은 2009년 대법관 취임 때 밝혔던 다짐에 비춰 지난 6년을 돌아봤다. 그는 “국민이 대법관에게 부여한 소명과 책무를 열과 성을 다해 수행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스스로 물어 보니 약속을 잘 지켰다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은 없다”고 했다.

민 대법관은 사법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는 상고법원을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올 연 말까지 대법원에 4만2000건의 사건이 접수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대법관 12명과 재판연구관들이 아무리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해도 벅찬 살인적인 수치다. 현재 상황으론 사법 신뢰를 언급하는 자체가 사치스럽다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민 대법관은 “상고를 엄격히 제한하는 상고제한제와 같은 제도를 도입하기 어렵다면, 상고법원이라도 도입해야 한다.직역 이기주의를 내세워 반대할 때가 아니다”며 국회에 계류중인 ‘상고법원안’이 빨리 통과되어야 한다고 했다.

민 대법관은 중국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첫 구절로 퇴임사를 마무리 했다.

“자, 이제 돌아가자. 고향 전원이 풀에 덮여 무성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그는 대법관 전원과 일일이 악수한 뒤 30여 년 간의 법관 생활을 마감했다. 한 자리에 모인 최고 법관들은 민 대법관이 차량에 오를 때까지 웃는 얼굴로 배웅했다.

민일영 대법관이 16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을 마치고 차량에 탑승하면서 양승태 대법원장을 비롯한 동료 대법관들에게 박수를 받고 있다.

민 대법관은 6년 임기 동안 사회적 관심이 높았던 상고심 사건 주심을 여러 차례 맡았다. 최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파기 환송한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은 원심이 유죄 증거로 인정한 ‘시큐리티 파일’과 ‘425지논 파일’의 증거 능력이 없다고 보고 사건을 서울 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트위터 계정 등이 담긴 이 파일들은 원심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를 인정하는 결정적 증거로 삼았다.

민 대법관은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의 불법 도청이 문제된 ‘안기부 엑스파일 보도 사건’ 전원합의체 주심을 맡아 유죄를 확정했고, 2012년 7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사건에서 기지 건설을 반대한 일부 주민들의 주장을 받아 들인 원심을 파기했다.

지난 6월에는 ‘외국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설립’ 여부를 묻는 전원합의체 사건에서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노조를 설립할 권리가 없다는 반대 의견을 냈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민 대법관은 1983년 서울 민사지법 판사로 법관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형사지법 판사, 법원행정처 송무심의관,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고법 부장판사, 청주지법원장을 지낸 뒤 대법관에 올랐다.

‘대법관 민일영’은 ‘대쪽’같은 판사의 표상으로 꼽혔다. 법원 관계자는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이라도 여론에 휩쓸리지 않고 소신을 관철한 분”이라고 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도 “전원 합의 과정에서도 자신이 도출한 결론이나 과정을 쉽게 바꾸지 않는 꼿꼿한 법관이었다”고 했다.

법원 안팎에서 민 대법관은 민사집행법의 대가로 꼽힌다. 법원도서관장 시절 법원의 민사집행법 커뮤니티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직 판사와 변호사들의 실무 교본격인 민법주해 발행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퇴임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지난 달 22일, 충남 천안에서 열린 민사집행법 학회 세미나에 참석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민 대법관은 앞으로 2년 간 사법연수원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와 사법 연구를 맡는 사법연수원 석좌 교수로 일할 예정이다. 후임인 이기택 후보자는 17일 오후 대법관에 취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