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생긴 부잣집 남자와 아름답고 똑똑하지만 평범한 집안 출신의 여자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의 사랑을 알게 된 남자의 엄마가 여자를 만난다. 남자의 엄마가 말한다. "내가 우리 아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남자의 엄마가 일어서며 남기고 간 봉투에는 아들과 헤어지는 대가라며 약간의 돈이 들어 있다. 자존심이 상한 여자는 남자에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애인을 잡고 싶고 엄마도 잃기 싫은 남자는 동분서주한다. 한국에서 평일 아침에도 주말 저녁에도 TV를 틀기만 하면 나올 법한 드라마 이야기다.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한다. 한국에서 부모가 자식의 결혼을 반대하는 건 흔한 풍경이다. 이 흔한 풍경이 미국에서는 흔하지 않다. 미국도 원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서 힐러 감독의 1970년 영화 '러브 스토리'에서 명문 부호의 아들인 올리버(라이언 오닐)는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의 딸 제니(알리 맥그로)와 사랑에 빠진다. 아버지는 자신의 반대를 무시한 아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끊고 아들은 어렵게 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성공하는데 아내는 불치병에 걸린다. 이제 이런 영화는 더 이상 미국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40년 동안 미국 중산층의 삶은 팍팍해졌다. 미국의 부모 중 자식이 결혼할 때 금전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경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 자식의 결혼을 반대하면 관계만 나빠질 뿐 결혼을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드라마 속 미국 부모들은 자식의 결혼에 대해 쿨하다. 문제는 아직도 결혼할 때 부모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한국의 청춘들이다. 그 손을 크게 벌려야 하면 할수록 부모 눈치를 보게 마련이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모든 아들들은 구조적인 '마마보이'들이다.
결혼할 때 부모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서 사는 건 스트레스다. 특히 결혼하고 싶은 상대의 부모가 자신을 싫어할 때 기분 좋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울해할 일만은 아니다. 상대의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은 내게 유리한 결혼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상대 부모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집안과 직업 혹은 학벌과 같은 객관적인 정보뿐이다. 성품이나 인성처럼 주관적인 정보는 알기 어렵다. 상대방 부모가 나를 반대한다는 것은 속된 말로 그쪽 조건이 내가 가진 것보다 더 좋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부모가 자녀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은 드라마에서처럼 그들이 몰상식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내 자식이 데려온 상대가 사랑이 아니라 돈과 같은 세속적인 이유로 결혼하려는 것은 아닐지 의심스러워서일 수도 있다. 자식이 데려온 결혼 상대의 인성과 성품 같은 주관적인 장점과 그 둘의 사랑이 얼마나 단단한지 확인해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그들을 곤경에 빠뜨려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달콤한 성공보다는 치열한 실패를 통해 자기 능력의 한계치를 깨닫는다. 부모가 자식의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 가진 한계치를 시험하는 셈이다.
결혼의 양상은 변한다. 점점 다른 선진국들을 닮아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의 부모도 미국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식이 결혼할 때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신들의 노후 준비만으로도 충분히 버겁고 교육에 너무 많은 돈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조금씩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자식들의 결혼에 대한 부모의 발언권은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아침 밤낮으로 보는 드라마 속 열혈 엄마의 모습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