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일 오후 9시쯤, 서울 지하철 압구정역 6번 출구 인근의 한 건물에 30·40대 여성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다음 날 오후 5시 선착순 150명만 입장시키는 한 배우의 팬 사인회 때문에 하루 전부터 줄을 선 것이다. 이날 자정쯤, 여성이 대부분인 대열 끝에 20대 남성 이모(28)씨도 줄을 섰다. 이씨는 한 여성팬의 의뢰를 받고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줄을 서주고 그 대가로 10만원을 받았다. 인기 연예인의 팬 사인회나 콘서트 티켓을 대신 구해주기 위한 '줄 서기' 아르바이트다.
대학생 이모(25)씨는 지난 3월 배우 김수현의 사인회가 열린 서울 강남역 인근 한 남성 의류 판매장 앞에서 밤새 줄을 섰다. 줄 서기를 의뢰한 홍콩의 한 여성팬은 행사 전날 오후 6시부터 이튿날 오전 10시까지 줄을 서는 대가로 시간당 2만원씩 32만원의 아르바이트비와 20만원 상당의 옷을 '보너스'로 줬다. 공짜인 팬 사인회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줄 서기 비용으로 50만원을 지출한 셈이다.
최근 한 스포츠 브랜드의 한정판 운동화 판매 때도 줄 서기 알바가 등장했다. 줄 서기 알바를 고용해 한정판 운동화를 손에 넣었다는 김모(26)씨는 "20만원 정도 하는 한정판 운동화를 사기 위해 마니아들은 이르면 3일 전부터 '캠핑'을 한다"라며 "직접 줄을 설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은 줄 서기 알바생을 쓰고 대략 10만원에서 20만원을 지급한다"고 했다.
줄 서기를 의뢰하는 사람들은 대개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지만,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줄 서기 아르바이트를 자주 한다는 한 대학생(23)은 "의뢰인 10명 중 6명은 직장인"이라며 "출근시간에 잠깐 줄을 섰다가 근무 중에 줄 서기 알바생을 세우고 퇴근 시간에 맞춰서 돌아오는 경우가 가장 많다"고 했다. 줄 서기 알바생들은 의뢰인과는 반대 경우가 많은데, 시급(時給)이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세다 보니 최근엔 부업으로 줄 서기를 하는 직장인도 있다. 서울의 한 일식집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박모(23)씨는 3년째 부업으로 줄 서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는 "유치원 선착순 모집이 시작되는 봄이나, 각종 음악 페스티벌이 많은 여름이 줄 서기 시즌"이라며 "출근 전인 오전이나 주말 등 남는 시간에 쏠쏠하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줄 서기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병훈 교수는 "하고 싶은 건 돈을 주고서라도 꼭 해야만 하는 젊은이와 돈을 벌 수 있다면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젊은이가 동시에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