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복원공사는 2003년 7월 첫 삽을 떠서 2005년 9월 30일에 완공되기까지 2년 3개월간 진행되었고 2005년 10월 1일, 서울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개천으로 거듭났다. 수많은 갈등과 문제를 안고 시작된 복원이었지만, 개통 58일 만에 방문객 1천만 명 돌파, 457일 만에 4천만 명이 돌파하는 등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서울의 명소로 당당하게 자리 잡았다.
청계천 복원 10주년을 맞아, 청계천의 역사와 개요 등을 정리했다.
[청계천 복원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7인의 스토리 ]
청계천의 역사
조선시대
청계천은 조선시대에만 해도 개천(開川)으로 불렸다. 청계천(淸溪川)이란 우아한 이름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쯤에 붙여진 것이다.
조선이 도읍으로 정한 한양(서울)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비만 오면 빗물이 시가지 중앙에 모였다가 지대가 낮은 동쪽으로 흘러갔다. 한데 걸핏하면 빗물이 제 갈 길을 가지 않고 시가지로 범람했다.
그러자 조선 왕조는 초기부터 빗물이 동쪽으로 잘 흘러가도록 개천을 파고 정비해 기본 하수도(下水道)로 만들었다. 개천에 생활하수가 마구 버려지면서 쓰레기와 모래가 바닥에 쌓여 장마철에 물이 넘치는 일이 잦아졌다. 1760년 영조는 20만명을 동원해 개천 바닥 토사를 퍼내고 일부 수로를 직선화하는 대대적 준설공사를 벌였다. 1770년에는 개천 양안을 전부 석축으로 바꾸는 대공사를 벌였다. 이후 준천을 담당하는 '준천사'라는 관청이 만들어져 2~3년 마다 한번씩 개천을 준설했다.
일제 시대
일제는 한국 강점 후 청계천을 10년 가까이 준설하지 않았다. 1918년 조선총독부 신축 공사를 벌이면서 비로소 청계천을 준설하고 일부 무너진 석축을 일본식으로 새로 쌓았다. 일제시대 청계천변 인구밀도는 급격히 높아졌고 오폐수도 급증해 병원균의 집결지가 됐다. 일본은 청계천 전면 복개 계획을 세웠지만, 태평로~무교동 구간만 복개했다.
한국 전쟁 이후
한국전쟁 후 청계천변에는 피난민과 월남민들의 판자집들이 들어찼다. 청계천에는 온갖 오물이 넘쳐났다. 정부는 교통·위생·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1958년부터 4년간 청계천 도심부 구간(광교~오간수교)을 복개했다. 이 과정에서 광교는 파묻혔고 석축은 흩어졌으며, 판잣집들도 헐렸다. 1966년에는 신설동까지 복개됐고, 1967~1971년에는 광교~마장동 구간에 청계고가도로가 건설됐다. 1977년 드디어 마장동 철교까지 청계천 복개가 끝났다.
20년쯤 지난 1990년대 후반, 청계고가도로가 낡고 위험하니 철거하고 복개도로도 뜯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2002년 서울시장 선거 때 이명박(李明博) 후보가 청계천 복원을 공약으로 내 당선됐고, 2003년 7월 착공했다.
[[청계천 복원] 폭우땐 수위 크게올라 홍수대책 시급]
청계천 개요
청계천의 명물
청계8경(景)은 아름다운 청계천에서도 반드시 찾아가봐야 하는 곳이다.
1경은 청계광장. 빛과 물의 만남을 통해 밤에 특히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도록 설계됐다. 분수대 아래로 하루 6만5000t씩 떨어지는 2단 폭포는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팔도상징석에서 독도를 찾는 재미도 있다. 청계천을 60m로 축소한 '청계 미니어처'엔 광섬유를 심어놔 밤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청계천 모형을 감상할 수 있다.
2경 광통교(廣通橋)는 조선 태종(이방원) 10년에 정동(貞洞)에 있던 태조(이성계)의 비(妃) 신덕왕후의 무덤을 정릉으로 옮기고, 남은 묘지석을 거꾸로 쌓아 만든 다리다. 도성 최대의 다리로 어가와 사신 행렬이 지나가는 중요한 교통로였고, 정월 대보름에는 다리밟기와 연날리기 장소이기도 했다. 줄여서 광교라고도 했다. 원래 위치는 지금의 광교 사거리였지만 복원하며 현재 위치로 옮겼다.
3경 빨래터. 옛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던 곳을 다산교와 영도교 사이에 재현해 놓았다. 실제 빨래를 하거나 물을 더럽히는 행위는 금지돼 있다. 인근 황학시장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벼룩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진귀한 물건들을 만날 수 있다.
4경 소망의 벽. 시민 2만여명이 자신들의 소망과 염원을 직접 쓰고 그려 넣은 타일을 모아 황학교와 비우당교 구간 좌우 옹벽에 각각 높이 2.2m 길이 50m로 조성한 곳. 개성 있는 글과 그림이 가득 담겨 있다.
5경 옥류천(玉流川).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높이 2.5m, 폭 1m로 마전교 상류에 위치해 있다.
6경 패션광장. 청계천의 중심이 되는 상징적 공간. 주변에 두산타워·밀리오레 등 패션전문상가가 즐비하다. 동대문 의류시장의 직물을 소재로 한 색동과 미술가 5인의 벽화작품이 설치된 문화의 벽등이 볼거리다. 패션분수도 화려한 조명을 받아 춤추듯 솟아오르는 장관을 연출한다.
7경 하늘물터. 2003년 8월 청계고가도로를 완전 철거하면서 교각 중 3개를 기념으로 남겨둬 청계천 복원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 곳이다. 분수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가 조명과 함께 화려한 터널을 이루는 모습도 자랑거리.
8경 버들습지. 버드나무와 갯버들·꽃창포 등 각종 수생식물을 옮겨 심어 만든 생물들의 서식공간. 청계천 중 가장 자연적·생태적 공간이다. 흰뺨검둥오리나 중대백로 등과 만나는 흥분도 느낄 수 있다. 8경 외 192m 길이의 도자벽화인 정조대왕능행반차도와 청계천문화관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청계천명물이다.
청계천 다리
*보도교 :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임시보도교), 새벽다리, 나래교, 맑은내다리, 두물다리
*차도교 : 모전교, 광교, 삼일교, 관수교, 세운교, 배오개다리, 마전교, 버들다리, 오간수교, 다산교, 영도교, 황학교, 비우당교, 무학교, 고산자교
*첫번째 다리 : 모전교
*마지막 다리 : 고산자교
*가장 긴 다리 : 19번째 다리 비우당교 46.6m
*가장 짧은 다리 : 2번째 다리 광통교 12m
청계천에 살고 있는 동·식물
청계천 문제점
▶생태 문제
한강 물을 퍼서 흘리기 때문에 자연적인 하천과는 수질의 분포도가 달라 어종의 분포도 특이하다.
청계천 주변에 나무도 많이 있고 풀도 많아 경관은 좋지만 벌레가 많이 생기고 장마철이 되면 악취와 함께 오수가 쏟아져 나와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다. 개천 바닥에 녹조류가 대량 발생하는 것도 문제다.
▶유물 문제
공사 과정에서 역사적 유물이 발굴되면 그 즉시 공사는 중단되고 유물 확인 작업부터 들어가게 된다. 복원 공사 당시 옛 교량의 흔적 등 조선시대 유물이 제법 나왔는데 그런 경우 공사 기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당시 이명박 울시장이 해당 유물들이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선언하고 공사를 강행했다. 이 유물들은 딱지만 붙인 채 죄다 하수종말처리장에 방치해 둬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 그나마 복원된 교량들은 제대로 복원이 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
▶교통 문제
청계천 복원 계획 발표 당시 가장 우려가 되었던 부분으로 교통량이 많은 청계고가도로를 없애면 교통지옥이 될 것이 자명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좁은 도로폭과 확장을 불가능한 도로 상황으로 동대문 의류상가 주변의 교통난이 지속되고 있다.
▶유지비 문제
사시사철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는 유량으로 인한 물값, 청소·경비 등 유지 보수 인력 비용, 전기세 등이 연간 70억 원 규모라고 알려져 있고 매년 그 비용이 상승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서울시에 재정적 부담이 되고 있다.
앞으로의 청계천
2012년 박원순 서울시장은 청계천 복원사업의 큰 방향은 "역사, 자연, 생명을 되살리겠다는 것"이라며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뒤 중구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진 수표교를 원래 위치로 이전하는 작업과 청계천 수질을 개선하는 생태 복원 방안을 제시한 적이 있다.
이처럼 2005년 처음 복원 이후에도 청계천의 복원 사업과 개선 정책은 지속적으로 논의 되고 있고 지난 10년간 청계천이 시민에게 줬던 도심 쉼터 기능 이상으로의 발전이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