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신입생 시절이었다. 생물학 실험시간에 현미경 관찰을 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조교가 세포 외곽에 막 구조가 두 개 보일 것이라고 했던 것 같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봐도 도무지 막은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늘 제대로 보지 못하면 집에 못 간다"는 말을 듣자마자 없던 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다툴 때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그때 실험시간의 경험에서 보듯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오히려 선입관의 반영(反映)일 가능성이 크다. 최근 미국의 한 프리랜서 고고학자가 90년 가까이 사람들의 눈을 가려온 진실을 밝혀냈다. 유타주 블랙 드래건 계곡에 있는 동굴벽화가 선입관 때문에 하늘을 나는 공룡으로 오인됐음을 입증한 것이다.
벽화는 1928년 처음 발견됐다. 사람들 사이에 "날개 달린 괴물"이라는 말이 나왔다. 언뜻 보기에 커다란 날개를 좌우로 펼치고 부리가 달린 입에 두 다리가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벽화는 당장 창조과학의 증거로 떠올랐다. 과거 사람들이 함께 살던 공룡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는 것. 지구는 45억년 전에 생겨났으며 인류가 탄생하기 한참 전에 공룡이 살았다가 멸종했다. 하지만 창조과학자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지구가 탄생한 지 7000년밖에 되지 않으며 인간과 공룡이 같이 살았다고 본다.
전문가들도 넘어갔다. 한 동굴벽화 전문가는 1970년 보고서에서 "날카로운 이가 나있는 부리를 봤다"고 기록했다. 1979년 저명한 지질학자는 "중생대 백악기에 하늘을 날았던 익룡(翼龍)과 흡사하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유타주의 동굴벽화가 처음 발견된 모습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1947년 존 시몬슨이라는 사람이 분필로 그림의 윤곽을 그렸다. 실제 그림은 중간중간 희미하고 물감인지 그냥 돌색깔인지 명확하지 않았지만 윤곽선은 하나로 이어졌다. 그는 그러고 나서 "이상한 새처럼 보인다"고 했다. 사람들이 말하던 대로 윤곽을 만든 것이다. 여기에 창조과학자들의 익룡 주장이 보태졌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눈이 아니라 시몬슨, 또는 창조과학자의 눈으로 벽화를 본 것이다.
프리랜서 고고학자 폴 반은 사람들의 눈을 가린 것은 분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익룡 신화를 깨기 위해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의 동굴벽화 전문가와 함께 먼저 벽화의 원래 색소(色素)와 후대에 덧칠한 색소를 분리하는 작업을 했다. 먼저 벽화를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후 첨단 그래픽 소프트웨어로 파일에서 원래의 색소인 석간주(石間硃)로 그려진 부분을 분리했다.
분석 결과 동굴에 그려진 그림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 왼쪽 날개 끝에는 두 마리의 네 발 동물이 있었고, 몸통과 두 다리는 커다란 사람의 모습이었다. 목과 부리는 또 다른 작은 사람이었고, 오른쪽 날개는 뿔 달린 뱀이었다. 이것을 나중에 분필로 연결해 하나의 익룡 그림으로 만든 것이었다.
휴대용 X선 형광장치로 분석한 결과도 같았다. 텍사스 A&M대 화학과 석좌교수이자 동굴벽화 전문가인 마빈 로위 박사는 "X선 분석에서 원래 그림이 있던 곳은 물감의 산화철 성분 때문에 철 신호가 강하게 나왔지만 익룡의 목과 몸통을 연결한 부분에서는 아무 신호가 없었다"고 밝혔다. 산화철은 석간주의 성분이다. 철 신호가 없던 곳은 원래 그림이 그려지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공룡은 6600만년 전 멸종했다. 고고학자들은 유타주 동굴벽화를 기원 후부터 1100년 사이 아메리카 대륙에 있었던 프리몬트 문화의 유산으로 규정했다. 당시에는 사람을 그릴 때 머리를 동그랗게 하고 팔다리는 길쭉하게 했다. 주변에는 시중드는 사람이나 소, 개 같은 네 발 동물들이 같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익룡에서 원래 모습대로 분리된 그림들도 그랬다.
동굴벽화가 공룡 그림으로 둔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미국 페이엣빌 주립대 생물학과의 필 센터 교수는 애리조나주 하바수파이 계곡에서 발견된 그림도 새를 하나의 심벌처럼 그린 것인데 한 다리를 연장하는 바람에 긴 꼬리를 갖고 두 발로 선 공룡으로 오인됐음을 밝혀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는 기린을, 캐나다 오타와주에서는 퓨마를 공룡으로 오인한 그림들도 밝혀졌다.
진실을 보려면 세상을 보는 생각의 틀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같은 것을 봐도 생각이 잘못되면 달리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과학철학자 노우드 핸슨은 저서 '발견의 유형'에서 관찰로부터 이론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이 오히려 이론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6세기 천문학자인 케플러와 티코 브라헤가 새벽에 해돋이를 같이 보는 상황을 제시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완성한 케플러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고 봤을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설을 계승한 티코 브라헤에게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회전하는 증거로 보였을 것이다. 최근 서울 유명 사립대 공대에 창조과학 강의가 개설됐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또 어떤 공룡 그림을 보게 할지 우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