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은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가 있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가을이 무르익는 요즘,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보존되어 있는 조선왕릉을 찾아 떠나보면 어떨까.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삼전도 굴욕을 겪은 인조의 '장릉'
조선 제16대왕 인조와 그의 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이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의 맏아들로 1595년 11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출한 뒤 즉위했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1637년 세자를 비롯한 500여 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 의식으로 청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리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주소 경기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 90 (비공개 왕릉)
한명회의 셋째 딸 장순왕후의 '공릉'
조선 8대 예종의 세자비인 장순왕후 한씨는 1445년(세종 27) 1월 16일 당대 절대 권력을 행사했던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딸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딸이면서 아름답고 정숙하여 1460년 4월 11일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책봉된 지 1년 7개월만인 1461년(세조 7) 11월 30일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인해 그해 12월 5일 안기의 집에서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승하하였다.
한명회의 넷째 딸 공혜왕후의 '순릉'
1467년(세조 13) 1월 12일 12세의 나이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잘산군과 가례를 올려 천안군부인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나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해 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5년 만인 1474년(성종 5) 4월 1일 열아홉의 나이로 소생 없이 창덕궁 구현전에서 승하하였다. "죽고 사는 데는 천명이 있으니, 세 왕후를 모시고 끝내 효도를 다 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9세 때 요절한 추존왕 진종의 '영릉'
영릉(永陵)은 영조의 큰아들 진종과 비 효순왕후의 능이다. 진종은 1719년(숙종 45) 2월 15일 영조의 맏아들로 태어났지만, 세자의 신분으로 9세에 요절하였다. 동생인 사도세자의 맏아들이 진종의 양자로 입적해 왕통을 잇게 되면서 추존왕이 됐다.
주소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ㅣ 전화 : (031) 941-4208
왕비 책봉 8일 만에 폐출된 단경왕후의 '온릉'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조강지처 단경왕후 신씨의 능이다. 단경왕후 신씨는 1506년 반정으로 중종이 등위 하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신씨의 아버지를 죽인 반정공신들의 반대로 중종 즉위 8일 만에 폐서인이 되었다. 후에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면서 묘호를 단경, 능호를 온릉으로 하였다.
주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 19
(비공개, 서오릉 관리사무소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답사 가능)
인종을 낳고 엿새 만에 숨진 장경왕후의 '희릉'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의 능이다. 1491년(성종 22) 7월에 태어나 고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1506년에 대궐에 들어가 처음 숙의에 봉하여지고 1507년(중종 2)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의 손위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1515년 25세에 세자(인종)를 낳고, 엿새 만에 산후병으로 사망했다.
효심이 깊고 우애가 돈독했던 인조의 '효릉'
조선 제12대 왕 인종과 인종의 비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인종은 1520년(중종 15)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후 25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다가 1544년 즉위하였다. 이듬해 기묘사화로 파방된 현량과를 복구하였고, 조광조 등의 기묘명현을 신원해 주었다. 성품이 조용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깊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농사짓다가 갑자기 왕이 된 철종의 '예릉'
조선 제25대 왕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이다. 철종은 전계대원군 광의 셋째 아들로 조부는 장조의 아들인 은언군이다. 1844년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헌종 15)에 덕완군에 피봉,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1850년 19세로 즉위하였다. 철종은 정치를 모르는 농군의 아들로 즉위하여 세도의 농간으로 국정을 잡지 못하고 후사도 없이 33세(재위 14년)에 요절하였다. 예릉은 조선시대 『국조오례의』, 『국조속오례의』,『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한 상설제도로서는 마지막 능이다.
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 ㅣ 전화 (031)-962-6009
효성이 지극했던 예종의 '창릉'
예종은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이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이 지은 야사모음집『연려실기술』에는 예종이 부왕 세조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받아 건강을 해쳤다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세조가 돌아가매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게 되어 이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창릉은 서오릉의 영역 내의 왕릉으로 조영된 최초의 능으로, 병풍석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봉분 주위에 난간석을 두르고 있다.
20세의 나이에 요절한 추존왕 덕종의 '경릉'
의경세자는 1438년(세종 20) 9월 15일 수양대군의 맏아들로 태어나 20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의경세자의 죽음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세조가 영월에 귀양 보낸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잠이 든 날 밤,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너는 흉악하고 표독스럽게도 내 아들의 왕위를 빼앗고, 목숨까지 끊으려고 하는구나! 네가 나의 아들을 죽이니, 나 역시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꿈에서 깬 세조가 뒤척이고 있는데, 동궁의 내시가 급히 달려와 세자가 위독하다는 말을 전한다. 세조는 급히 동궁으로 달려갔지만, 의경세자는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고 한다.
숙종과 그의 두 계비가 묻힌 '명릉'
명릉은 19대 숙종과 그의 첫 번째 계비인 인현왕후, 두 번째 계비인 인원왕후 세 사람을 모신 능이다. 오른쪽 언덕을 왕이 차지하는 일반적인 왕릉과 달리 명릉에서 가장 낮은 서열의 인원왕후의 능이 가장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인원왕후가 1757년(영조 33) 71세로 승하하였을 때, 국고와 인력의 문제로 원래 정해두었던 자리에 묻히지 못하고 숙종의 오른쪽 언덕에 잠들게 되었다.
천연두 발병 8일 만에 숨진 인경왕후의 '익릉'
인경왕후는 20세 때인 1680년(숙종 6) 10월에 천연두 증세를 보이며 앓기 시작했다. 전염을 우려한 숙종은 경덕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였으며, 인경왕후는 발병 8일 만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영조의 비 정성왕후의 '홍릉'
영조는 한 평생을 함께 했던 부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정성왕후의 행장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왕궁 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제전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겨 기록한다.
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 ㅣ 전화 : (02) 359-0090
인조반정으로 추존된 추존왕 원종의 '장릉(김포)'
인조의 아버지로 추존된 원종과 그의 비인 인헌왕후의 능이다. 추존왕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1587년 정원군에 봉해졌으며,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 아들인 능양군이 반정 세력의 추대를 받아 조선 16대 왕 인조로 즉위하자 정원대원군에 추존, 9년 후인 1632년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주소 경기도 김포시 장릉로 79 ㅣ 전화 : (031) 984-2897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광릉'
세조는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1417년(태종 17) 9월 29일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문종이 승하하고 나이 어린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측근인 권람,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1453년(단종 1)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同原異岡)릉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는 최초로 조영되었다.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 ㅣ 전화 : (031) 527-7105
불운한 삶을 살다간 정순왕후의 '사릉'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었다가 18세에 단종과 이별하고, 부인으로 강등되어 평생을 혼자 살아갔다. 궁궐을 나온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의 동망봉 기슭에 초가집을 짓고 시녀들이 해오는 동냥으로 끼니를 잇다가, 염색업을 하며 평생을 살았다. 1521년(중종 16) 6월 4일을 일기로 장장 7대 왕대에 걸친 삶을 마감하였으니, 이때 춘추 82세였다.
주소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 ㅣ 전화 : (031) 573-8124
임진왜란 후 부국강병의 기틀을 다진 광해군의 '광해군묘'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과 그 부인 문화 유씨의 묘소다.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1575년 6월 4일 태어났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국가 안위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1608년 왕위에 올랐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됐다.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 59
고종과 명성황후가 함께 묻힌 '홍릉'
1895년(고종 32) 일본 정부의 사주로 낭인에 의해 경복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한 명성황후는 궁궐 밖에서 시신이 소각되었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복호되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춘추 67세로 고종이 승하하자 그해 3월 4일 현재의 위치에 조성하면서 천장론이 일던 명성황후의 능도 옮겨와 합장으로 예장하였다. 홍릉은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능역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
황제에서 이왕으로 강등된 순종의 '유릉'
종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순종은 황제위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1926년 4월 25일 5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며, 조선 왕릉 중 한 능침에 세 명의 수장자를 합장한 유일한 동봉삼실형이다.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ㅣ 전화 : (031) 591-7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