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전 총리는 2009년 이후 두 차례 기소됐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2009년 12월 한 전 총리가 총리 재직 시절 공기업 인사 청탁 명목으로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5만달러를 받았다는 혐의(뇌물수수)로 기소했다.
이후 검찰은 ‘5만달러 뇌물수수’ 사건 1심 선고가 내려지기 하루 전인 2010년 4월 한 전 총리의 불법정치자금 9억원 수수 사건 수사에 착수했다. 뇌물 사건 수사 진행 와중에 제보가 들어와 별도로 수사에 착수한 것이었다.
5만달러 뇌물 사건 수사 당시 한 전 총리는 야당의 상징적인 인물로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야당은 거세게 반발했고, 검찰로서도 “명운을 걸었다”고 할 정도로 수사에 총력전을 폈다. 하지만 이 사건은 1, 2, 3심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법원이 5만달러 사건에 무죄를 선고한 결정적인 이유는 “곽 전 사장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곽 전 사장은 검찰에선 5만달러를 한 전 총리에게 “직접 건넸다”고 했다가 법정에선 “총리 공관 의자에 두고 나왔다”고 바꿨다. 그러나 한 전 총리에게 5만달러를 건넸다는 진술은 일관되게 유지했다. 그런데 무죄가 선고됐다.
불법정치자금 사건에서 한 전 총리에게 돈을 건넨 건설업자 한만호씨는 법정에서 진술을 통째로 바꿨다. 한씨는 검찰에서 금품 전달 과정을 자세히 진술해 놓고도, 법정에선 “지어낸 얘기”라고 번복했다. 1심은 한씨의 증언을 믿을 수 없다며 한 전 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항소심과 대법원은 돈을 줬다는 한씨의 진술이 인정된다며 실형을 선고했다.
뇌물이나 불법정치자금 사건은 특성상 금품 공여자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부 진술이 흔들렸지만 공여자가 돈을 줬다는 점은 끝까지 인정한 사건은 무죄, 돈을 줬다는 진술을 통째로 바꾼 사건은 유죄가 선고된 것이다. 무엇이 이런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온 것일까.
검찰과 법원 관계자들은 돈을 줬다는 진술을 뒷받침할 ‘보강증거’가 그 이유라고 말한다. 5만달러 사건에서 유일한 증거는 돈을 줬다는 곽 전 사장의 진술 뿐이었다. 이를 뒷받침할 직접적인 보강증거를 검찰은 내놓지 못했다. 검찰은 곽 전 사장이 평소에 한 전 총리에게 1000만원 상당의 골프채를 선물하는 등 돈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란 점은 밝혀냈지만, 5만달러가 건네지는 과정을 입증할 보강증거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9억원 불법정치자금 사건은 달랐다. 결정적인 건 수표였다. 한씨는 애초 검찰에서 한 전 총리에게 현금과 수표, 달러로 9억원을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이 중 수표 1억원을 한 전 총리 동생이 전세금으로 사용한 것이 드러난 것이다. 이외에도 한씨가 나중에 한 전 총리에게 3억원 반환을 요구한 것도 밝혀졌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한 전 총리 여동생이 모르는 사람(한만호씨)으로부터 1억원짜리 수표를 받았을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이는 한 전 총리가 건네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또 법정에서 한씨 회사의 부하직원(경리부장)이 한 전 총리에게 건넬 돈을 담은 사실을 자세히 증언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한씨 회사 경리부장이었던 정모씨는 법정에서 “돈을 사장님(한만호씨)과 함께 여행가방에 넣었으며, 사장님은 ‘이 돈은 의원님(한 전 총리)에게 갈 돈’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당시 처음에는 누구에게 돈을 주는 것인지 잘 몰랐지만, 사장님이 회계장부에 ‘한’이라고 적는 것을 보고, 한 전 총리에게 갈 돈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돈을 건넨)3차례 모두 내가 할인점 등에서 구입한 딱딱한 어두운 색 여행가방에 사장님과 함께 돈을 담았는데, 1만원권을 먼저 쌓고, 달러는 (그 위에다) 나중에 담았다”고도 했다. 대법원은 “자금 관리와 비자금 조성에 핵심적 역할을 한 경리부장도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어 한씨의 검찰 진술 전부를 믿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한씨가 법정에서 “지어낸 얘기”라며 진술을 뒤집었지만, 돈이 건너간 정황을 입증할 보강증거가 많아 유죄가 선고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씨는 왜 진술을 바꾼 것일까.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검찰은 한씨를 위증 혐의로 기소, 현재 1심이 진행 중이다. 한씨 재판에서 그 이유가 밝혀질지도 관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