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바다, 하늘 그리고 바람. 모항의 바닷가는 작고 아담하지만 자연의 모든 혜택을 입은 곳이다.

전북 모항에서 만난
홍상수 월드

때론 어떤 영화가 촬영된 곳에 직접 가는 것이, 그 영화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때가 있다. 바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그렇다. 그의 영화에선 ‘공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의 강원도, 과 의 서울 북촌 지역, 의 춘천과 경주, 의 종로 거리, 의 태안 신두리 바닷가, 의 파리, 의 제천과 제주, 의 통영, 의 아차산... 감독은 최근 이 목록에 하나를 더했다. 의 모항. 전라북도 부안의 변산반도 한자락에 있는, 작은 항구이자 아늑한 해수욕장이 있는 그곳이다.

는 세 개의 에피소드로 나뉘어 있으면서도 느슨하게 연결되고,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의외의 곳에서 캐릭터와 상황이 맞물리는 구조의 영화다. 이 영화의 모든 이야기는 영화과 학생인 원주(정유미)가 펜션에서 끄적거린 단편적이면서도 즉흥적인 시나리오다. 원주는 모항에 있는 펜션을 중심으로 안전요원(유준상)과 영화감독 종수(권해효)와 문수(문성근), 종수의 아내인 만삭의 금희(문소리)를 등장시킨다. 이야기 속엔 원주 자신도 있고 어머니(윤여정)도 나온다. 프랑스 여인 안느(이자벨 위페르, Isabelle Huppert)는 영화감독으로, 문수의 불륜 상대로, 바람 난 한국 남자와 이혼한 여자로 캐릭터를 바꿔가며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환상 동화 같은 이야기인 가 현실성을 지닐 수 있는 건, ‘모항’이라는 현실의 공간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펜션을 중심으로, 안전요원이 머무는 텐트와 바닷가와 갯벌과 횟집 등의 지점을 맴돈다. 그리고 안느는 언제나 묻는다. “여기 등대가 어디 있죠?” 하지만 그 누구도 등대가 있는 곳을 모른다. 안느는 환상 속에서나 등대를 만날 뿐이다. 재미있는 건, 내소사에서 불공 드리는 장면을 제외하면, 이 영화의 사건들은 반경 1킬로미터 안에서 모두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 지척의 거리 안에서 불륜이 오가고, 우연히 만났다며 반가워하고, 누군가는 계속 등대를 찾는다. 어쩌면 이런 풍경이 ‘홍상수 월드’인지도 모르겠다.

모항은 해수욕장과 갯벌이 함께하는 곳이다. 그리고 갯벌엔 작은 생명체들이 꿈틀거린다.

하얀 등대를 찾아,

서울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세 시간 정도 걸려 도착한 모항. 가장 먼저 반긴 건 갯벌 체험장이었다. 모항의 바닷가는 무엇이 덮고 있는지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모래가 덮고 있는 곳은 해수욕장, 진흙이 덮고 있는 곳은 갯벌이다. 오후 2~3시가 되면 물이 들어오는 그곳은 영화 속에선 종수가 안느에게 수작을 걸다가, 아내 금희에게 들키는 곳. 현실 속에선 가족 단위로 모항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이 갯벌에 발을 담그고, 호미로 조개를 캐고 있다.

모항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 초입에 있는 갯벌 체험장. 오후 2~3시면 물이 들어오기에, 오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갯벌의 묘한 질감을 즐긴다.
해수욕장 근처 몇몇 펜션이 모여 있다. <다른 나라에서>가 촬영된 펜션(블루웨스트)의 창 밖으로 보이는 서해안 풍경. 영화에서 이자벨 위페르가 문성근을 기다리던 ‘하늘방’에서 촬영했다.

그곳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오면 갯벌 위에 어선 몇 척이 밀물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고, 그 건너편엔 를 본 사람이라면 매우 익숙할 하얀 펜션이 눈에 띈다. 영화 개봉 이후 이따금씩 일부러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이자벨 위페르가 묵었던 ‘하늘방’과 권해효와 문소리가 묵었던 ‘노을방’은 나름 인기다. 안타까운 건 정작 펜션 주인아저씨는 아직까지 영화를 못 보셨다는 사실. 영화를 보려면 전주까지 승용차로 2시간30분 가야 한다고 하시는데, 여름 밤에 모항해수욕장에 천막 스크린을 걸어놓고 를 노천 상영하는 것도 꽤 인상적인 이벤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하얀 펜션, 하얀 하늘, 하얀 구름. 펜션의 ‘하늘방’을 배경으로 찍은 외
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오솔길 같은 통로. 우거진 노송이 그늘을 만든다. 모항해수욕장 주변은 깔끔하게 조경된 소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다른 나라에서>의 안전요원 유준상이 헤엄치던 바닷가를 바라보는, 모항해수욕장의 ‘진짜’ 해상안전요원. 여름 시즌, 10여 명의 안전요원이 모항을 지킨다.

밀집되었다곤 할 수 없지만 꽤 여러 채 모여 있는 펜션촌을 뒤로 하고 몇 걸음만 안쪽으로 발을 옮기면 드디어 모항해수욕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내려봐도 한 눈에 쏘옥 들어올 정도로 아담한 모항해수욕장은, 동해안 해수욕장만큼이나 물이 맑고, 갑남산의 나지막한 산세가 둘러싸고 있어 해수욕장임에도 산바람이 솔솔 불어오며, 백사장을 조금만 벗어나면 커다란 소나무들이 배경을 이룬다. 영화에선 안전요원인 유준상이 텐트에서 생활하는데, 실제로  모항해수욕장 주변은 텐트촌으로 꾸려져 있다. 질주하는 바나나보트나 선남선녀들의 로맨스보다는, 가족 단위로 찾아와 텐트 치고 삼겹살 굽고 갯벌에서 조개 캐고 바닷가에선 아이들이 물장난 치는 풍경. 바로 모항의 모습이다.

<다른 나라에서>엔 유준상이 텐트에서 생활하는 설정이 등장하는데, 실제 모항에 와 보면 설정이라기보다는 매우 일상적인 모습이다. 자그마한 해수욕장을 둘러싼 텐트촌의 모습. 텐트만 가져오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해수욕장 주변에 난 산책길에서 바라본 바다. 모항은 마치 동해안을 연상시키는, 맑은 물이 특징이다.
영화에서 이자벨 위페르가 잠시 머물렀던 길 위. 왼쪽으로 가면 영화 내내 그녀가 그토록 찾던 등대가 나온다.

영화 속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등대도 근처에 있다. 현대해상 수련원 너머로 5분 정도만 걸어가면 키 작은 등대 하나가 작은 어촌을 지키고 있다. 낮에 태양열로 모아놓은 전기로 밤을 밝히는 이 등대는, 종종 드라마에도 등장했다고. 에선 이자벨 위페르와 문성근이 키스를 나누는, 환상의 공간이다. 이곳의 풍경은 물이 들어왔을 때와 빠졌을 때가 꽤 달라 보인다.

갯벌과 해수욕장 사이, 작은 어촌 마을. 등대 앞에 있는 작업장에서 바지락 양식을 위해 양식용 소라를 손질하고 있는 어부.
영화에서 이자벨 위페르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등대는 모항 한 구석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 물이 들어올 때와 나갈 때, 그 풍경이 사뭇 다르다.
뙤약볕 아래 긴 시간 동안 기다림 속에서 포착한, 등대 밑 갯벌에 살고 있는 작은 게의 모습.

에서 유일하게 모항을 벗어나는 건, 윤여정과 이자벨 위페르가 내소사를 찾을 때다. 모항에서 자동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그곳은 변산반도국립공원 안에 있는 절로, 문을 들어서면 100년이 넘은 나이테를 자랑하는 전나무들이 길 양옆에서 사람들을 맞이한다. 그렇게 10분 정도 걷다 보면, 아담한 내소사 정문이 나온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 혹시 들른다면 영화에서 안느가 그랬던 것처럼 기왓장에 작은 소원 하나 적어 빌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안도현 시인은 ‘모항으로 가는 길’이라는 시에서 “모항을 아는 것은 / 변산을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라고 했다. 모항은 변산반도의 최종 도착지 같은 곳이며, 그렇게 도착한 모항은 손님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름 한 달 동안 그 주변을 주섬주섬 걸어 다니며 한 편의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곳, 모항.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기억을 떠올리며, 굳이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추억을 만들기 위해, 이 여름 찾을 만한 바닷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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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VON 2012년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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