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세 K씨는 회사 고문으로 일하다가 2년 전 은퇴했다. 고혈압 외에는 비교적 건강하게 지냈는데, 은퇴 무렵부터 기억력이 좀 떨어져 보였다. 말수가 줄어들고 만사를 귀찮아하며 사람 만나기와 운동도 덜 했다. 또 한 가지 변화는 사소한 일에 잘 삐치고, 가끔 불같이 화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기억 실수에 대해 지적을 하거나 운동과 씻기를 권하면 과거와 달리 불같이 화를 냈다.
아내는 은퇴 증후군이겠거니 생각을 하고 지냈는데, 최근에 화내는 증상이 더 심해지고 동작이 약간 둔해져 병원을 찾았다. 인지기능 검사 결과, 전두엽 기능과 기억력이 떨어져 있었다. 뇌 MRI 촬영 결과,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무(無)증상 뇌경색이 다수 발견됐다. 혈관성치매 아주 초기였다.
뇌혈관 중 큰 혈관이 막히면 그 즉시 말을 못하거나 한쪽 팔다리가 마비되는 등 뇌경색 증상이 바로 생긴다. 그러나 작은 혈관이 막히면 한 번에 손상되는 뇌 세포 양이 적어서 증상이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게 무증상 뇌경색이다. 이것이 반복되면 K씨와 같은 증상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K씨의 MRI에서 보는 것처럼 무증상 뇌경색이 전두엽 쪽에 흔히 발생하기 때문이다.
전두엽에는 동기센터와 충동억제센터가 있다. 동기센터에 이상이 생기면 만사를 귀찮아하고 잘 씻지 않으려 한다. 속옷을 잘 갈아입던 사람이 말을 해야 갈아입는 등 게을러진다. 동시에 말수가 줄고 얼굴 표정이 감소하며 운동을 싫어한다. 곧잘 우울증으로 오인된다.
충동 억제센터가 손상되면 자꾸 신경질을 낸다. 별것 아닌 일로 삐치거나 화를 낸다. 조급증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예정 시간보다 지나치게 일찍 준비를 하거나, 자신이 요구한 바를 당장 들어주지 않으면 역시 화를 낸다. 또한 판단력이 떨어지면서 고집이 세지고 융통성이 없어진다. 틀린 판단을 고집하는데, 이를 말리면 화를 낸다.
물론 어떤 사람이 화를 잘 내고, 게을러졌다고 하여 모두 혈관성치매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심장병, 흡연, 운동 부족 같은 동맥경화나 혈관 막힘 위험 요소를 가진 50~60대 이상 성인이 언젠가부터 게을러지고 우울 증상을 보이고 화를 잘 낸다면 전두엽 동기센터와 충동조절센터에 작은 혈관 막힘이 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 게다가 발음이 안 좋아지고, 물을 삼키거나 식사를 할 때 자주 사레가 들리고, 동작이 둔해지면 무증상 뇌경색에 의한 혈관성치매 초기를 더욱 의심해야 한다. 동작이 둔해지는 증상은 부부가 같이 걸을 때 예전과 달리 뒤처지거나 승용차에 타고 내릴 때 약간 늦어지는 증상 등으로 알 수 있다.
K씨는 술을 완전히 끊었고, 고혈압약, 고지혈증약, 아스피린을 복용하면서 운동을 꾸준히 한 결과, 증세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처럼 무증상 뇌경색 혈관성 치매는 조기 발견, 치료 효과를 크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