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대륙 동쪽 끝에 붙어 있던 작은 신생국이 70년 세월 속에 대국(大國)이 되었다. 식민지와 전쟁과 가난을 딛고 일어났다. 그 국민은 광부로, 선원으로, 군인으로, 노동자로 해외에 나가 피와 땀을 흘렸다. 대한민국은 대한국인(大韓國人)의 눈물 없이는 존재하지 못했다.
고희를 넘긴 그 나라가 지금 무척 힘들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이 나라를 만들고 지키고 살아내는 백성, 대한국인이 아닌가. 지난 70년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대한국인이 또 이 나라를 만수무강하는 날까지 이끌어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모든 대한국인에게 박수를!
봄이 되면 묵통 대신 구두통, 여름이 되면 아이스케키통
학교는 언감생심… 가난했던 기억밖에 없다
6·25전쟁이 끝나고 6년이 지난 1959년 2월이었다. 구자관은 청계천을 걷고 있다. 작년 이맘때 자관은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두세 달씩 차이 나는 외사촌 네 명도 같은 날 졸업했다. 졸업식엔 참석했지만 자관은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입에 풀칠하기 힘든 살림 탓에 자관은 월사금을 밥 먹듯 빼먹고 결석도 밥 먹듯 했다. 며칠 뒤 외사촌들은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서 중학교에 입학했다. 사촌들 입학식 날 자관은 꺼먼 군복을 입고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청계천으로 갔다.
'밥 먹듯?' 자관은 어른들 표현이 불쾌했다. '밥이라도 먹었으면 좋겠다.'
해가 바뀌었다. 아이스케키 통이 구두 통으로, 다시 메밀묵 통으로 바뀌었다. 군복은 구멍이 나고 색이 바랬다. 태어나고 일 년 하루 만에 맞은 해방은 전혀 기억에 없었다. 전쟁에 대한 기억도 어렴풋했다. 열다섯 살 소년의 뇌세포에 각인된 기억은 가난뿐이었다. 교복 입은 외사촌들 뒷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자관은 메밀묵 통을 윗도리 속으로 감췄다. 작년에도 그러했듯 봄이 오면 묵 통은 구두 통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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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나의 어머니, 통밀가루 수제비 건더기 모두 주고 소금국물만 드셔…
그러니 혈압 오죽하셨을까… 일흔한 살 지금 눈물이 난다
먹고살 만해지면서 사람들은 더러운 일은 남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아웃소싱, 1960년대 말로는 미화 용역이었다. 구자관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월 6푼짜리 달러빚을 내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이윤보다 이자가 더 많았다. 물건은 팔면 팔수록 손해였다. 몸을 쓰는 청소 일이 오히려 나았다. 만든 걸레는 아버지가 나가서 팔고, 자관은 아줌마들을 고용해 식당 변소와 빌딩 복도를 청소하고 다녔다. 자관은 일하는 곳마다 귀신처럼 찾아오는 빚쟁이들을 피해 다니면서 변기를 닦았다.
자관이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수제비를 밥상에 올리곤 했다. 통밀가루로 만들고 멸치 몇 마리로 육수를 낸 멀건 수제비에 건더기도 별로 없었다. 자관은 자기 수제비를 다 건져 먹고 옆에 있는 어머니 수제비도 건져 먹었다. 어머니는 국물로 배를 채웠다. 수제비가 떨어지면 어머니는 별미로 인기였던 라면을 끓였다.
"왜 또 국물을 드세요?" "수프가 닭고기라잖니. 소고기 대신에 이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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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 딱 1년 만 하자" 삼척行… 월급은 공무원의 3배
탄가루 몸에 박고 사는 인생, 매일매일이 삶과 죽음의 경계였다
1974년 4월 어느 날 서른 살 먹은 한창석은 삼척행 완행열차에 올랐다. 창석은 전남 구례군 문척면 사람이다. 구례구역에서 조치원, 조치원에서 제천, 제천에서 태백, 이렇게 꼬박 하루 걸려 삼척 문곡역에 도착했다. 탄(炭)을 가득 실은 대형 트럭들이 오갔다. 아스팔트 도로에 발을 내딛는 순간 구둣발이 도로 속으로 발목까지 처박혔다. 아스팔트가 아니라 탄가루가 늪처럼 쌓인 황톳길이었다. “여자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던 ‘막장 도시’ 삼척이 그렇게 구례 촌놈을 맞았다. 삼척 장성과 황지는 훗날 삼척에서 분리돼 태백시가 되었다.
“내가 왜정 때 탄광 끌려가 봐서 잘 알아. 광부는 절대 허락 못 하네.”
석 달 전 창석은 광양 처녀 옥례와 결혼했다. 장인은 탄광에 가겠다는 사위를 극구 말렸다. 칠순에 접어든 부모님도 결사반대였다. 나이 마흔 다 돼서 얻은 외동아들이 막장에 간다니. 하지만 초등학교를 2학년 때 관두고 열다섯 살 이후 서울 공사판을 전전한 청년이 돈 벌 곳은 막장밖에 없었다. 창석은 “구경이나 하고 오겠다”며 열차를 탔다. 일곱 살 아래 각시는 집에 남겨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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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도 못나온 어린 소녀들, 작업대서 키가 자라고 생리도 시작
"오빠 대학 보내고 약값 벌어야 해" 그땐 그런 희생은 당연한 일이었다
“집 구하고 돈 좀 쌓이면 너랑 동생도 부를게.” 엄마는 짐 보따리를 지고서 열차에 올랐다. 1979년 여름이었다. 열여섯 살 된 소녀 고선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엄마에게 손을 흔들었다. ‘서울 가면 공부 열심히 해서 외국 여행 하면서 살아야지.’ 예쁘장한 선미는 스튜어디스가 꿈이었다. 나이 비슷한 막내 이모, 외사촌 언니와 함께 미스코리아를 흉내 내며 놀던 소녀였다. 동네 언니한테서 옷 만드는 기술도 배우던 차에 서울로 간다니, 이 시골 소녀는 이미 태평양과 대서양을 훨훨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선미는 충남 조치원에 살았다. 아버지·엄마,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열차 상인에게 계란이며 오징어를 대주던 아버지 덕에 유복하진 않아도 남부러울 일 없이 살았다. 책보자기 대신에 책가방도 있었고 레이스 달린 자주색 원피스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아버지가 하늘로 갔다. 선미네는 가난 구덩이에 빠졌다. 돈 벌러 간 엄마는 이듬해 선미와 남동생을 서울로 불렀다. 엄마는 구로공단의 의류 공장 대우어패럴 구내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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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고 튼튼하게 그렇지만 빨리 만들라" 시공사·감독·노무자 모두가 '미친놈'
과로·사고에 현장엔 怪談까지 난무… 그렇게 대한민국 대동맥이 뚫렸다
1964년 12월 6일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가 비행기에 올랐다. 대통령 전용기도 없는 가난한 나라인지라 비행기는 서독 정부가 내준 루프트한자 649호였다. 이륙 전 그가 말했다. "종전(終戰) 후 폐허 위에서 위대한 경제 건설과 번영을 이룩한 독일연방공화국의 부흥상을 샅샅이 시찰할 것이다." 독일 도착 다음 날 박정희는 본에서 쾰른까지 아우토반으로 왕복했다. 왕복 40㎞였다. 주행 시속은 160㎞. 귀국 후 대통령은 직접 도로 그림도 그리고 지프를 타고 암행도 다니며 귀신에 씐 듯 고속도로에 몰입했다. 서독 방문 만 3년 2개월이 지난 1968년 2월 1일 서울 양재동에서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이 열렸다.
기공식을 열하루 남긴 1월 21일 북한의 김신조 부대가 청와대를 향해 쳐들어왔다. 23일에는 푸에블로호가 납치됐다. 박정희는 "싸우면서 건설하자"고 했다. 반대가 심했다. 그 돈이면 공장을 열 개 짓는 게 낫다고도 했다. 야당은 "국토 균형 개발을 위해 동서 간 고속도로를 뚫자"고 했다. 귀신에 씐 박정희는 밀어붙였다. 귀신 이름은 '조국 근대화'라고도 했고 '선진 조국'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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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버스 올라 동생학비 벌어… 손님 밀쳐올릴 땐 '욕바가지'
알몸 삥땅 검사에 매질까지… "차비 빼돌린다" 옷벗기고 뒤져
1961년 6월 교통부는 8월 1일부터 시내버스 차장을 전원 여자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사회기강 확립을 주문했던 정부였다. "남자 차장들에 의하여 가끔 발생하는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없이 하기 위함." 6월 12일 부산 시내버스를 시작으로 8월까지 전국 버스 차장이 남자에서 여자로 교체됐다. 이미 2년 전 서울 버스에 여차장 87명이 시범 운영된 적도 있던 터라 사람들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다음 정류장을 안내하는 젊고 예쁜 여자 안내원들을 기대했다.
1960년대 사람은 남아돌았다. 여자는 더 남아돌았다. 사람값은 쌌고, 여자값은 더 쌌다. 많은 시골 계집아이가 보따리를 들고 무작정 도시로 올라왔다. 하지만 무학(無學)의 10대 소녀들에게 돌아갈 일자리는 없었다. 차장은 학력은 물론 나이도 제한이 없었다. 식모보다 나았고 직공보다 쉬웠다. 사람대접 못 받는 대한민국 여자들에게 여차장은 쉽게 취직할 수 있는 꿈의 직업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직업과는 거리가 있었다. 사회는 사람대접 못 받는 여자들을 딱 그만큼만 대접했다. ▶기사 더보기
사람은 넘치고 배는 없던 시절… 목숨 걸고 외국 화물선 탄 '送出 선원'
"1년만 죽을 고생 하면 집 산다더라" 전쟁도, 해적도 우릴 막지 못했다
꼬장꼬장한 아버지 덕에 박중성은 배를 곯았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온갖 뇌물 상자를 마다하고 살았다. 국장급까지 올라갔지만 평생 관사(官舍)에서 산 터라 집도 절도 없고 돈도 없었다. 그는 6·25전쟁이 터지고 아내와 8남매를 데리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란을 내려왔다. 부산역이 내려다보이는 영주동 달동네에 터를 잡았다. 박중성이 열한 살 때다. 대한청년단 본부도 영주동에 있었고 극장 기도, 항만 관리를 하는 거친 사내들이 영주동에 많이 살았다.
아버지는 친구가 운영하는 광복동 동아극장 건너편 신선한의원에서 수은을 섞어 임질약을 만들어 팔다가 중성이 스물한 살 때 중풍으로 하늘로 갔다. 돈 버는 재주가 없었던 아버지는 집안 경제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거친 영주동 사내들이라면 대개 그러했듯 중성은 강원도 화천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공장에 다니다가 배를 탔다. 1970년 스물여덟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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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6㎞앞까지 들이닥쳤을 때 1만4000명 빽빽하게 '기적의 승선'
사흘 항해 뒤 1만4005명으로 늘어 '최다 인원 구출 선박' 기네스북에
"보름 있다가 올라오너라." 어미가 며느리에게 말했다. 함흥에서 흥남 구룡리 부잣집 3대 독자 이석초에게 시집온 김재남은 갓 걸음마를 배운 세 살배기 군필을 둘러업고 걸음을 옮겼다. 만삭이었다. 남편 석초는 사진가였다. 구룡리에 있는 배둔사진관은 장사도 잘됐다. '보름만' 이라고 어미와 아들은 생각했다. 카메라를 짊어진 남편과 배 속과 등에 두 아이가 달린 아내가 부두에 도착했다. 1950년 12월 21일이었다. 바닷바람이 엄청나게 추웠다.
부두는 사람과 군수품이 가득했다. 바이올린만 들고 온 사내, 재봉틀을 머리에 이고 온 여자, 퍼덕대는 닭 한 마리를 끌어안은 계집아이…. 사람들은 차가운 바닷물로 뛰어들어 배를 향해 걸어갔다. 부두 한쪽에서는 병사들이 군수물자에 폭약을 설치하고 있었다. 아수라장이었다. 비행기에서 이 광경을 본 알몬드 장군이 부관 알렉산더 헤이그 대위에게 말했다. "반드시 전원 구출하라." 사람들과 물자를 집어삼킨 미군 상륙함들은 속속 바다를 향해 돌진해갔다. 작은 목선들은 사람들을 서 있는 채로 태우고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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