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스마랑·암바라와
암바라와의 포로 수용소
日, 수감된 네덜란드 소녀들을 버스에 태워 위안소 끌고가
조선 여성 본 기억 난다는 현지인의 증언도 남아있어
스마랑은 항구다. 인도네시아 자바섬 중부에 자리한 도시로, 과거 명나라 탐험가 정화(鄭和)의 선단이 기항하기도 했다. 부산항에서 직선거리로 그어도 5100㎞에 이르는 여기 머나먼 동남아 고도(古都)에도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경남 하동 출신 고(故) 정서운 할머니는 "일본 공장에 취직하면 경찰서에 붙잡힌 아버지를 풀어준다"는 말에 속아 스마랑으로 끌려왔다.
요즘도 스마랑으로 곧장 가는 항공편은 없고, 자카르타에서 한 번 갈아타야 한다. 지난 6월 24일 스마랑행(行) 비행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군도(群島)가 부스러기처럼 바다 위에 퍼져 있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펴낸 증언록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 위안부들'에 따르면 동남아 위안부들은 통통배에 태워져 일본군이 진주(進駐)한 섬에서 섬으로 끌려 다니며 욕을 당했다. 이런 작은 섬엔 위안소라고 부를 건물도 없었다. 나무판자로 칸만 질러놓고 그 안에 위안부를 밀어 넣었다고 한다.
스마랑에 도착한 날은 라마단(Ramadan·금식월) 7일 차였다. 공항이 우리 시골 간이역 크기만 했다. 열기에 아스팔트가 흐물흐물 녹아, 걸을 때마다 운동화가 쩍쩍 들러붙었다. 70년 전 스마랑 시내에는 쇼코클럽, 스마랑클럽, 히노무라, 후타다소라고 불린 위안소가 있었다. 지금 도심은 호텔과 가게가 차지하고 있었다. 기자가 "성노예(sex slave)나 위안부(comfort women)가 있었던 곳을 아느냐"고 물으니 다들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학원 강사 리즈키 아딧야(32)씨가 유일하게 "뉴스에서 봤다"며 위안부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그는 "인도네시아가 유럽 세력에 370년 지배를 받아온 것에 비하면 일본이 점령한 3년은 비교적 짧다"며 "역사 수업에서 일본 점령기는 비중도 적고, 일본군이 여성을 학대했던 것은 배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륙 안쪽으로 28㎞쯤 달리자 근교 도시 암바라와가 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회색 건물군(群)이 포로수용소였다. 암바라와 포로수용소는 그 자체로 위안부 강제 동원의 증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적대국 국민을 이곳에 수감했다. 1948년 전범재판소 기록은 일본군이 여성 포로들을 위안소로 끌고 가는 모든 과정을 소상히 적고 있다. 당시 네덜란드 위안부 여성의 법정 증언이다. "암바라와 수용소를 찾아온 일본군들이 18~20세 소녀들을 불러모았다. 위안소로 데려가는 것 아니냐고 묻자, '일본인들은 그 정도로 사악하지 않고, 그런 생각 하는 여성이 나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후 나는 버스에 태워져 스마랑 위안소로 끌려갔다." 우리 여성들이 포로수용소에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암바라와 토박이 고(故) 압둘 카부르 전 디폰네고로대학 방사선과 교수는 생전에 "어릴 적 포로수용소에서 저고리 입은 조선인 여성을 본 기억이 난다"고 우리 교민들에게 말했다.
담벼락에 '라파스 암바라와(LAPAS AMBARAWA·암바라와 감옥)'라고 써놓은 파란색 글귀가 보였다. 포로수용소 시설은 인도네시아 육군이 영창(營倉)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민간인 통제구역이어서 "외국인이 여기엔 무슨 볼일이냐"면서 수차례 검문검색을 당했다. 그럴 때마다 "예전에 한국 사람들이 여기 포로수용소로 끌려왔었다"고 한참을 설명해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포로들이 수감되어 있던 방은 곰팡이가 붙어서 사방이 새카만 빛깔이었다. 문을 열자 훅 하고 썩은 내가 밀려왔다.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바닥을 기었다. 벽돌을 무릎 높이로 쌓아 올린 게 침대고, 바스러지는 나무탁자가 유일한 가구였다. 손을 대기만 해도 콘크리트 조각이 후드득 떨어졌다. 1평 남짓한 크기였는데, 채광창이 별스럽게 높게 달려 있었다. 나무 창살에는 철조망이 넝쿨처럼 감겨 있었다. 이렇게 규격화된 방이 건물당 24개다. 수감시설은 화장실이나 창고, 가축우리로 변모해 있었다. 무너질 것 같은 기와지붕 위에서 오리 떼가 모이를 쪼았다.
전범재판 판결문에 따르면 1944년 2월, 일본군은 "사무 업무를 한다" 등의 거짓말로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네덜란드 부녀자 35명을 선발했다. 위안부들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가족을 죽인다" "매일 많은 남성을 상대해야 하는 군 위안소로 보내겠다"고 협박을 당했다. 재판 결과, 일본군 관계자 11명이 강제 매춘을 위한 유괴와 매춘 강요, 강간 등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위안부 사업에 깊숙이 개입한 오카다 게이지(岡田慶治) 육군 소좌는 사형이었다.
조선인 여성들이 있던 곳은 네덜란드 여성들에게 "거부하면 데려가겠다"고 협박한 군 위안소였다. 우리 정부 조사에 따르면 조선인 위안부는 매일 50명 이상의 일본군을 받았다. 몸이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군의관은 할머니 팔뚝에다 아편을 찔러 넣었다. 나중에는 아편을 다섯 대씩 맞아야 비로소 아래가 아프지 않았다. 함께 있던 23명의 조선인 위안부 여성 가운데 14명이 자결하거나, 풍토병에 걸려 숨졌다고 한다.
고 정서운 할머니도 위안부로 이곳에 끌려온 지 1년 만에 자결을 시도했다. 말라리아 약을 하나하나 모아서 40알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그때는 이렇게 사는 게 싫었어. 나중에 알았는데 밑으로 코로 입으로 전부 피가 터져 나왔다는 거라. 이틀 만에 깨어났는데 사람 소리가 들려. (다른 위안부) 애들이 '아이고 살아났구나' 그러면서 울더라. 죽으려고 그래도 죽지도 못하고 내가 산 거라."
[일본軍 위안부 참상의 현장을 가다]
1992년 서구 여성으로는 위안부 첫 고백… '스마랑 위안소' 생존자 루프 오헤른
- 본지와 이메일 인터뷰
"100명도 넘는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인권 유린 당해"
작년 日작가 시오노 나나미
"서구 여성을 위안부 삼은 얘기 확산될 경우엔 日에 치명적"
"내가 감금당했던 스마랑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이미 허물어지고 돌무더기만 쌓여 있더군요. 자바섬 원주민이 제게 속삭였습니다. 여기서 네덜란드 여성들이 끔찍한 일을 당했노라고."
얀 루프 오헤른(Jan Ruff O'Herne·92) 할머니는 생존해 있는 유일한 '스마랑 위안부'다. 그는 본지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1990년대 위안소가 있던 인도네시아 스마랑을 한 차례 찾아간 일을 기억했다.
루프 오헤른 할머니는 "100명도 넘는 여성이 조직적인 강간(systematic rape)을 당했고, 함께 있던 네덜란드 소녀는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며 "(일본군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발설할 경우 가족을 죽여버리겠다고 우리를 협박했다"고 밝혔다. 이어 "일본 정부가 위안부 역사를 부인하고 있지만, 그들은 분명히 그 일을 저질렀다"고 덧붙였다.
루프 오헤른 할머니는 네덜란드령(領) 동인도(현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손꼽히는 무역상이던 아버지 밑에서 부유하게 자랐다. 수녀(修女)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1942년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침공하면서 그의 인생은 궤도를 벗어났다. 스마랑 위안소로 끌려간 다음부터는 스스로 머리를 싹 밀어버렸다. 추하면 자신을 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호기심에 '머리 밀어버린 처녀'를 더 찾았다. 전쟁이 끝나고 할머니는 영국군 장교와 결혼했고, 1960년 호주로 이주해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1992년, 그는 서구권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위안부 출신임을 고백했다. TV에서 우연히 한국 위안부들의 절규를 접하곤 피해 사실을 밝힐 용기를 냈다고 한다. 1994년에는 자신의 위안부 경험을 담은 저서 '50년의 침묵'을 출간해 호주 사회를 중심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07년 일본을 방문한 존 하워드 당시 호주 총리는 기자들 앞에서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여성이 피해를 당했고 그중에 호주 여성도 포함됐다는 것은 더 이상 둘러댈 수 없는 엄정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호주 국적인 루프 오헤른 할머니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구미(歐美)권 여성이 위안부 피해자라는 점은 일본을 난처하게 하고 있다.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지난해 '문예춘추(文藝春秋)' 기고에서 "네덜란드 여성을 위안부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확산할 경우, 일본에 대단히 치명적일 수 있다"면서 "유럽에서 생활하면서 서양인들이 기독교인, 특히 백인종 여자와 어린이가 박해받은 사실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썼다.
루프 오헤른 할머니는 평소 "아베 총리의 사과를 받을 때까지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해 왔다. 그런 그가 올해부터는 건강상의 이유로 공식적인 언론 인터뷰를 자제하고 있다. 인터뷰는 딸 캐럴 러프씨가 어머니와 대화를 나눈 뒤, 다시 기자에게 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