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을 그대로 닮은 곳이 있다. 도림천이 숨죽여 흐르고, 관악산이 뒤를 받치고 있는 한 동네에 수많은 청춘이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몰려들었다. 다닥다닥 붙은 ‘쪽방’ 고시원과 서점들은 청춘의 낭만을 잠시 미뤄두고 더 큰 미래를 그리기 위해 그들이 인내의 시간을 함께 했던 공간이다. 한낮에도 적막한 공기가 맴도는 서울 관악구 대학동(옛 신림9동), 일명 ‘신림동 고시촌’이다.

◆ 판자촌, 서울대 이전으로 고시촌 ‘탈바꿈’

신림동 고시촌은 원래 판자촌이었다. 서울 도심 개발로 밀려난 철거민들이 관악구 봉천동과 신림동 일대에 자리를 잡으면서 생긴 곳이다. 고시촌이 형성된 것은 1975년 서울대학교가 이 지역으로 이전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신림 고시촌 위치도.

3대 국가고시로 불리는 사법고시와 행정고시, 외무고시를 준비하는 서울대 학생들이 근처에서 방을 구해 시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합격자가 다수 배출되면서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1999년 대학동 전체 인구 2만6000여명 중 서울대 하숙생과 고시생이 1만5000여명에 달했을 정도다. 고시 준비 학원과 서점, 고시원, 고시 식당들까지도 덩달아 늘었다.

2003년 서울 신림동 고시촌의 한 고시학원에서 고시 수험생들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매년 합격자 발표일이면 신림동 고시촌의 상징인 광장서적 앞에 연례행사처럼 사람들이 몰려든 것도 이 시기다. 신림동에서 20여년 간 거주한 정성훈 북션 대표는 “합격자 발표일 명단 종이가 서점 앞에 붙으면 수백여명이 달라붙어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는 진풍경이 벌어졌었다”면서 “당일 밤 인근 술집은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사람들로 채워졌다”고 말했다. 2000년대까지의 일이다.

◆ 국가고시 축소·폐지로 침체일로

신림 고시촌에도 변화의 물결이 찾아왔다. 계기는 2009년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도입이다. 사법고시 인원이 해마다 줄고 2013년 외무고시마저 폐지되면서 고시촌을 떠나가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행정고시 축소는 고시촌 침체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서울통계를 보면 올 1분기 관악구 대학동 인구는 2만3036명으로 15년 전인 2000년과 비교하면 상주인구가 10% 가까이 줄었다. 현재 인구 수가 2만804명으로 비슷한 인근 동작구 상도1동이 같은 기간 5174명에서 네 배 가까이 인구가 증가한 것과 대조적이다.

인구가 줄고 유동인구도 따라 줄며 인근 상권도 침체하기 시작했다. 빈 고시원과 원룸이 많이 늘어난 것은 물론, 합격자 발표일마다 연례행사를 치르던 광장서적도 2013년 결국 문을 닫았다. 남아 있는 대형 서점은 손에 꼽을 정도다.

B서적 관계자는 “몇 년 간 이름만 대면 알만한 큰 서점만 2개가 문을 닫았다”며 “하도 장사가 안 되니 고시촌 터줏대감격인 서점들 사이에서도 ‘다음은 누구 차례?’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도 나온다”고 말했다.

고시생들이 한달치 식권을 미리 끊어 저렴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던 고시식당도 줄었다. 인근 대규모 고시식당은 3년 전까지 12~13개가 남아 있었지만 최근엔 6개로 줄었다. S고시식당 관계자는 “수년 전만 해도 한 끼에 300~400명이 먹을 정도였는데, 이젠 하루 매출을 다 따져도 이 정도가 안 된다”고 말했다.

서울 대학동 신림 고시촌을 형성한 원룸과 고시원 건물들.

◆고시생 빠지고 직장인과 공시생 들어와

고시생이 떠난 빈 자리는 직장인들이 채우고 있다. 전셋값을 감당하기 힘든 수요자들이 대학동 신림 고시촌과 봉천동 등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지하철 2호선이 뚫려 있어 강남 등 사무실 밀집 지역과 가깝다는 지리적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동 T공인 관계자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0만~60만원이면 괜찮은 방을 찾을 수 있고, 보증금 100만원에 20만원대 후반의 방이라도 세탁기와 옷장, 싱크대 등을 모두 갖춘 풀옵션 원룸이 많아 젊은 직장인들이 많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신림동 고시촌’을 대표했던 광장서적의 분점이 있던 건물. 이 건물은 카페로 리모델링 됐다.

노량진에서 몰려 있던 공시생(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도 이젠 신림동 고시촌을 채우는 한 축이다. 지하철 9호선 개통으로 상권이 살아나고 있는 노량진에 비해 집값은 물론, 물가도 저렴해 생활비가 적게 들기 때문이다. 수강생이 줄어들면서 대책에 나선 고시학원들이 7·9급 공무원 준비 과목을 잇달아 개설하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여건이 좋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9급 공무원을 1년간 준비하고 있는 이모(25)씨는 “노량진보다 고시원 월세가 절반 수준이고, 신림동에서도 관련 수업을 듣는 데 문제가 없어 여기서 수험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