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중(美英中) 정상이 참가한 카이로 회담(1943년 11월 22~26일)과 미·영·소(美英蘇)의 테헤란 회담(11월 28일~12월 1일)은 미·영 양국 정상의 이동 시간을 감안하면 사실상 연달아 열렸던 '쌍둥이 회의'다. 왜 두 회의는 한 군데서 열리지 않고, 불편하게 두 장소에서 나뉘어 열린 것일까.

우선 소련은 1941년 4월 일본과 맺은 중립 조약 때문에 대일(對日) 전선에서 다른 연합국과 보조를 맞추기 힘들었다는 분석이 있다. 소련은 일본 패망 이후 전후 처리 구상을 주로 논의했던 카이로 회담에 참가하지 않는 대신, 테헤란 회담을 통해 유럽 전선에 대한 공동보조를 밝히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28일 테헤란 회담에서 "독일이 최종적으로 격파되면 시베리아에 필요한 지원군을 보낼 수 있고, 우리는 공동 전선에서 일본을 칠 수 있을 것"이라며 대일 참전을 약속했다.

신변 안전에 민감한 스탈린이 카이로보다 소련에 인접한 이란의 테헤란을 골랐다는 해석도 설득력있다. 미 국무부 외교 문서에 따르면, 1943년 9월 루스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에게 이집트를 회담 장소로 고려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스탈린은 끝내 테헤란을 고집했다.

만주를 비롯한 동북아 지역의 전후 주도권을 놓고 중·소(中蘇) 양국이 경쟁 관계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루스벨트는 카이로 회담을 한 달 앞둔 1943년 10월 장제스와 사전 협의하려고 미국 대통령 특사 패트릭 헐리 준장을 중국 충칭(重慶)에 파견했다. 당시 소련의 회담 의사를 묻는 헐리의 말에 장제스는 "시기 미숙"이라고 답했다. 중·소의 '불편한 관계'는 1945년 종전(終戰) 이후 국공(國共) 내전이 다시 불거지면서 현실이 되고 만다. 결국 루스벨트는 4국 정상회담 개최 계획을 수정해, 미·영·중 3국 회담과 미·영·소 3국 회담으로 양분했다. 두 회담 일정은 11월 8일 미국의 최종 통보로 확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