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생동감이 넘치는 도시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저마다 삶의 터전을 마련하며, 곳곳에 그들의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들이 뭉치는 과정에서 공동체가 생겨났고, 동네는 특유의 색깔을 품게 됐다. 하지만 요 몇십년간 서울은 너무 급작스럽게 변했다. 몰려드는 인구와 자본은 가장 효율성이 높은 방식으로 이 동네들을 헤집어놨다. 조선비즈는 그때 그곳을 찾아, 세월에 따라 어떻게 이 지역들이 바뀌고 있는지 살펴봤다. [편집자주]
도심 재개발로 사라진 곳이 많다지만, 여전히 서울 곳곳에는 옛 추억을 담고 장인의 명맥을 묵묵히 이어가는 동네가 있다.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수십년간 쇠를 깎아온 금속 가공인들과 의류제조업체가 빽빽이 들어찬 종로구 창신동, 수십년간 한 분야를 파고든 장인들은 늘 보는 같은 자리에서 누군가를 위한 명품(名品)을 만들고 있다.
서울 성동구 성수2가도 이런 곳 중 하나다. 긴 세월 수제화를 만들어온 장인들이 무리를 지은 성수동 구두골목. 1990년대부터 20년 넘게 수제화 장인들이 모여 구두 산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 곳은 성수동을 대표하는 상징 중 하나다.
◆ 500여개 업체 모인 국내 최대 수제화 단지
지하철 2호선 성수역 1번 출구를 나오면 수제화 가게가 잇달아 늘어선 거리가 펼쳐진다. 성수역 1번 출구와 2번 출구 교각 공간에 서울시가 조성한 구두 공동판매장 ‘프롬SS’라는 가게 8곳과 길 건너 3·4번 출구 뒤쪽으로 자리 잡은 조그만 수제화 매장들이 있다. 성수역을 중심으로 5개 구역에 500여개의 업체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수제화 가게들이 처음 들어선 곳은 서울역 인근 염천교였다. 1925년 경성역(현재 서울역)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몰리자 잡화상과 구두 수선점들이 생겨났고, 해방 후 미군이 신던 중고 전투화로 신사화를 만드는 가게가 잇따라 문을 열었다.
‘구두 중심가’는 1960년대부터 20년간 명동으로 이동했다. 문인들과 연예인 등 서울의 내로라하는 멋쟁이들이 명동으로 몰리면서 이 일대 구두 가게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시 공무원이 한 달에 35만원을 벌 때 수제화 상인들은 월 120만원을 벌었다고 하니, 이들은 일대 상인 중에서도 알아주는 부자였다고 한다. 세일을 하면 경찰이 나와 단속을 해야 할 정도로 장사가 잘됐을 정도였다.
성수동으로 수제화 장인들이 건너온 건 1990년대부터다.
한 때 대한민국 3대 구두 브랜드였던 금강제화와 에스콰이아, 엘칸토 생산공장이 이곳에 있어 가죽과 액세서리, 부자재 등 구두재료 업체들이 함께 따라 들어왔고, 땅값이 저렴해 수제화 업체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현재 이곳에는 350여개의 수제화 완제품 생산업체와 100여개의 중간 가공원부자재 유통업체가 있다. 한국 수제화 제조업체의 70% 이상이 아직 이곳에 밀집돼 있다.
수제화 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극심한 침체를 겪었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중국 저가제품에 밀려났기 때문이다. 한때는 1000곳에 달했던 구두 관련 업체들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이곳에서 수제화 업체를 운영하는 김모 씨는 “에스콰이아나 엘칸토 같은 대형 업체들이 무너지면서, 이 업체들에서 제품을 주문받던 소규모 구두 제조업체도 많이 사라져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추락하던 수제화 거리를 살린 건 이곳의 장인들이었다. 이들은 2009년 서울성동수제화협회협동조합을 만들어 2011년 공동 판매장인 성수수제화타운(SSST, Seoul Sung-su Sujewha Town)을 열었다. 설립 7개월 만에 매출 5억원을 달성했고, 행정안전부(현재 행정자치부) 우수마을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때마침 서울시도 수제화 산업을 살리는 데 힘을 보탰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2년부터 성수동 수제화산업 육성사업 추진에 나섰다.
◆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며 진화 중
최근에는 성수역이 새로운 문화타운으로 떠오르면서 인근 상인들의 기대도 크다. 아무래도 유동인구가 늘어날수록 수제화 가게를 찾는 사람이 많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정미소였던 대림창고는 현재 패션쇼와 전시회가 열리는 문화예술공간으로 활용되고, 주변에는 젊은 층이 모이는 멋스러운 카페도 많이 생겼다.
성수2가 1동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한 중개업자는 “예전과 비교하면 수제화 가게가 많이 깔끔해졌고, 정부에서 수제화 산업 육성 지원을 하면서 인근 상권을 찾는 수요도 많이 늘어났다”며 “수제화 거리가 인근 건대나 뚝섬 상권 등과 비교하면 아직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수제화 거리의 진화는 앞으로 계속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