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 정전 후... 한국, 승전국 日에 가로막혀 독립 인정 못 받아
100년 전 유럽은 대전(大戰) 중이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성이 신호탄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 민족주의 청년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황태자는 아니었지만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 이후 황위 계승 예정자가 됐다. 훗날 제2차 세계대전과 구별하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라고 명명된 이 전쟁의 사망자는 약 1500만명에 이르렀다.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정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 새로운 평화 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됐다.
1919년 1월 28일 개막한 파리강화회의 결과, 사라예보의 총성이 울렸던 날과 같은 날인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체결된 베르사유 평화조약(패전국 독일)을 시작으로 다섯 개의 평화조약들이 잇따라 체결됐다. 1919년 9월 10일의 생 제르망 앙 레이 조약(패전국 오스트리아), 11월 27일의 뇌이 조약(패전국 불가리아), 1920년 6월 4일의 트리아농 조약(패전국 헝가리), 그리고 1920년 8월 10일의 세브르 조약(패전국 오스만투르크 제국)이었다. 세브르 조약은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으로 대체됐다. 이 다섯 개의 평화조약이 만들어낸 국제 체제를 베르사유 평화 체제라고 부른다.
이승만 서한 가져온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의장에 건네다
파리강화회의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여는 ‘창세기’였다. 세계 지도가 새롭게 그려졌다.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사우디아라비아·시리아·이라크·레바논·아르메니아 등은 독립국이 됐다. 쿠르드족(族)의 나라 쿠르디스탄도 세브르 조약 당시 지도상에 표기됐지만 로잔 조약에 의해 부정됐다.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도 세계 지도가 새롭게 그려지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했다. 파리강화회의를 주도하고 있던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이승만이 박사학위를 받았던 프린스턴 대학의 정치학 교수 출신이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체류 중이던 이승만은 미국 정부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지 못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 대표의 자격으로 파리로 향했던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총장에 임명됐다. 3·1운동은 파리강화회의에서 김규식의 외교 활동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낳았다. 3·1운동의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 근거지를 둔 것은 당시 개최되고 있던 파리강화회의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았다.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을 인정받고자 했던 여러 민족의 운명을 가른 것은 그들을 지배했던 제국들의 승패 여부였다.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민족들은 당당히 독립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대한제국을 강점했던 일본 제국은 승전국이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이어 승리한 일본제국은 ‘세계 5대 강국’의 하나가 되었다.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와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가 이끄는 68명의 일본 공식 대표단에는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등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범들은 물론, 전후(戰後) 일본 부흥의 리더가 되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도 포함되어 있었다.
1912년에 수립된 중화민국도 참전국이자 승전국의 자격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다. 윌슨 대통령과 외교 담판을 벌인 중국 외교관 웰링턴 쿠(Wellington Koo, 중국명 구웨이쥔·顧維鈞)를 비롯한 대표단 60명은 파리 중심가의 고급 호텔 루테티아(Lutetia)를 거점으로 일본과 ‘외교전’을 벌였다. 중화민국 대표단은 독일 식민지였던 산둥반도의 이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에 반대하며 베르사유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 제르멩 앙 레이 조약에는 서명함으로써 국제연맹 창립 회원국이 됐다. 이로 인해 신생 중화민국의 외교적 대표성도 크게 신장됐다. 더불어 몽골 일부를 제외한 청(淸)의 영토 전체에 대한 한족(漢族)의 계승권도 인정받았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았지만... 세계에 독립 당위성 알려
파리에서 김규식이 만났던 미국 측 핵심 인사는 외교관이자 언론인 스티븐 본잘(Stephen Bonsal)이었다. 본잘은 1891~1896년 베이징과 서울, 도쿄를 방문한 경험이 있었으며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군의 일원으로 유럽 전선에 참전했다.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그는 파리강화회의 기간 당시에는 윌슨 대통령의 개인 통역을 맡았다. 본잘은 파리강화회의 당시 윌슨의 최측근이었던 에드워드 하우스(Edward House)를 대신해서 김규식을 만났다. 본잘은 한국에 호의적이었지만 결정권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하우스의 허락을 받아 본잘이 김규식에게 줄 수 있었던 대답은 “코리아는 평화회의에서 다루어질 정도로 세계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유럽에서 전범(戰犯)을 응징하게 되면 정의의 징표가 될 것이고 나중에 국제연맹이 일본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도였다.
하지만 김규식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파리 9구 샤토됭 거리 38번지 건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회’ 사무실을 내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김규식은 조르주 클레망소 파리강화회의 의장에게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서한을 전달하기도 했다. 김규식은 “독립 요구는 달걀로 바위 치기와도 같은 일”이라고 했지만,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유럽 신문들도 한국 임시정부 파리위원회 활동에 관한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파리강화회의 석상에서 5대 승전국의 하나였던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일본도 모든 것을 얻지는 못했다. 인종 평등 조항을 국제연맹 규약 서문에 넣으려는 시도는 다수의 찬성에도 불구하고 윌슨과 영국의 반대로 좌절됐다. 후쿠자와 유키치 이래로 매진했던 ‘탈아입구(脫亞入歐)’ 정책이 사실상 종언을 맞은 것이었다. 이후 일본은 왜곡된 아시아 공동체 주의인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지정학적 야욕에 빠져들었고, 결국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자 패전국이라는 더 큰 파국을 초래하고 말았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연합국 정상들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미뤘던 한국 독립의 세계사적 정당성을 마침내 인정하게 된다. (김명섭·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공동 기획: 대한민국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