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숨지기 전 냉동 보관한 정자로 아이를 낳은 경우 부부의 친아들로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가정법원은 홍모(41)씨가 아들 정모군을 남편의 친아들로 인정해 달라며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지난 18일 밝혔다. 홍씨의 남편은 위암이 발병하자 2012년 12월과 2013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정자를 채취해 냉동했다. 남편이 사망한 후 홍씨는 정자를 해동했고 시험관 시술을 통해 올해 1월 아들을 낳았다.

생체 냉동 기술이 발달하면서 홍씨 부부처럼 항암 치료 등을 앞둔 사람들이 정자나 난자를 냉동 보관하려는 사례가 늘고 있다. 최근엔 젊을 때 난자를 냉동 보관했다가 나중에 아이를 갖고 싶을 때 사용하려는 골드 미스 여성들의 수요도 증가하고 있다.

서울 제일병원 불임연구실 액체질소탱크에서 한 연구원이 영하 196도에서 냉동시킨 정자 앰플을 꺼내고 있다. 정자는 세포 내에 수분이 적어 비교적 냉동이 쉬운 편이다.

생체 냉동은 결국 물과의 싸움

지난 22일 오전 서울 중구 제일병원 불임연구실. 높이 80㎝ 정도 크기의 저장 탱크를 열자 하얀 기체가 쏟아져 나왔다. 정자를 얼리는 데 사용하는 영하 196도 액체질소 증기다. 탱크 안에는 5㎝ 크기의 앰플 300여개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바로 옆에는 난자를 보관하는 탱크도 보였다.

정자 냉동은 주로 항암 치료를 앞둔 사람이나 불임 부부들이 이용한다. 항암 치료를 받게 되면 생식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전에 미리 난자와 정자를 받아놓으려는 것이다. 보관 기간은 보통 5년이다. 생명윤리법에 따라 이 기간이 지나면 향후에도 더 보관할 것인지 의사를 묻는다. 냉동 보관료는 시험관 시술비까지 합쳐 30만~35만원 선이다.

정자 냉동의 핵심은 세포에 들어 있는 수분 제거다. 부경대 화학과 김학준 교수는 "물이 얼면 뾰족뾰족한 얼음 결정체가 생긴다"며 "크리스털 모양의 이 결정체가 세포를 찔러 손상을 입힌다"고 했다. 손상된 세포를 복원시킬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없다. 냉동이 성공하려면 세포 내 물을 모두 빼내 얼음이 생성되는 걸 막아야 한다.

물을 빼낸 자리에는 동결 억제제를 채워 넣는다. 세포를 글리세롤·DMSO 등의 동결 억제제에 담그면 삼투압 현상으로 세포 내 물이 세포 밖으로 빠져나오고 그 자리에 동결 억제제가 들어간다. 세포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처음엔 저농도의 동결 억제제에 담갔다가 점차 고농도로 옮겨간다. 해동할 때는 반대로 고농도의 동결 억제제에서 시작해 저농도로 내려간다. 이 과정에서 세포 속의 동결 억제제가 빠져나가고 물이 다시 들어간다.

정자가 해동 후 완벽하게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정자의 머리 부분은 거의 살아남지만 꼬리 부분과 정자에 운동성을 주는 허리 부분의 생존율은 급격하게 떨어진다고 한다. 수정시에는 바늘 등으로 직접 정자를 난자 안에 집어넣는 방법을 사용하는 이유다.

정자는 수분량이 적고 구성 단백질(프로타민)이 구조적으로 냉기에 강해 냉동이 쉬운 편이다. 최초의 냉동 세포로 정자가 선택된 이유다. 1946년 개구리의 정자를 시작으로 1950년에는 소의 정자, 1954년에는 사람의 정자를 냉동 보관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생식 세포지만 난자의 경우는 더 까다롭다. 난자는 보통 한 번에 2~3개 정도를 여성의 몸에서 추출해 볼펜 심처럼 생긴 스트로에 보관한다. 일반 세포보다 5만배 이상 크고 수분이 85% 정도를 차지해 이를 모두 빼내는 게 쉽지 않다. 정자는 일부분이 손상돼도 기능할 수 있지만 난자는 작은 손상에도 수정이 어렵기 때문에 성공률도 더 낮다. 이 때문에 배아 상태일 때 냉동을 견뎌내는 힘이 더 강하다는 점을 감안, 부부의 경우엔 정자와 난자를 수정시켜 배아를 만든 후 배아 자체를 냉동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냉동 인간도 원리는 동일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

세포를 얼릴 수 있다면 신체 일부 또는 전체를 얼렸다가 녹이는 것도 가능할까. 1946년 개구리의 정자가 냉·해동되는 과정을 목격한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에틴거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는 이 생각을 정리해 1962년 '냉동 인간'이라는 책을 펴냈다. 실제 미국 알코어 생명연장재단은 사망한 사람을 즉시 냉동시켜 보관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고객이 사망하면 시신을 얼음 통에 집어넣고 산소 부족에 따른 뇌 손상을 막기 위해 심폐 소생 장치로 호흡과 혈액 순환 기능을 복구시킨다. 생명은 끊겼지만 몸만 살려 놓는 식이다. 그리고 기계로 남아 있는 혈액을 모두 빼낸 뒤 동결 억제제를 집어넣는다. 비용은 1억5000만원 정도. 현대 의학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을 가진 사람들이 미래에는 치료제가 개발될 것이라 믿으며 서비스를 신청하고 있다.

신체 냉동은 원리는 세포와 같지만 현실적으로 커다란 한계가 있다. 몸 수분을 제거하기도, 동결 억제제를 곳곳에 넣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국가영장류센터 김선욱 책임연구원은 "동결 억제제를 넣을 수 있는 곳은 혈관이 닿는 곳까지인데 고등동물일수록 모든 세포가 혈관과 맞닿아 있는 게 아니라 동결 억제제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사각지대 수분이 얼면서 신체가 훼손될 수 있다. 세포마다 특성이 달라 각각의 세포에 맞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힘들다는 것도 문제다.

에틴거는 미래에 나노 기술이 발달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세포가 손상되더라도 몸속을 돌아다니며 세포를 수리해주는 나노 로봇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아이디어 수준이다.

현재 생체 냉동 기술이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은 수요가 많은 산부인과 가임력 보존 분야다. 이 분야에선 정자·난자 냉동을 넘어 조직 중 하나인 난소를 냉동하는 기술도 활발하게 연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