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최보윤 기자

영국 런던 동부 작은 동네 쇼디치(Shoreditch)는 다소 낯설게 들린다. 그러나 '유럽의 할리우드'라는 런던 내에서도 '전 세계 트렌드 1번지'로 꼽히는 곳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 파격적인 시선으로 예술계에 충격을 준 미술가 데이미언 허스트와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트레이시 에민 등 현대 미술사의 거대 물결을 만들어 낸 yBa(Young British Artists), 길거리 낙서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그라피티(거리 낙서) 작가 뱅크시가 모두 쇼디치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거나 주무대 삼았다.

좀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의 배경이자 셰익스피어가 상당 기간을 거주하며 '커튼 시어터'라는 공연 무대에도 올랐던 곳이 바로 쇼디치다. 발 닿는 거리 곳곳 뿌리 깊은 예술의 DNA가 넘실댄다.

가난의 역설, 창의·도전을 이끌다

최근 찾아가 본 쇼디치는 단순한 '예술가의 전시장'이 아니었다. 유명 셰프 제이미 올리버의 레스토랑 '피프틴'을 비롯해 산업 디자인의 거장 톰 딕슨의 '쇼디치 하우스' 등 유명 레스토랑과 카페가 늘어서 있고, 트렌드 세터들의 아지트로 불리는 에이스와 바운더리 등 부티크 호텔이 줄줄이 들어섰다. 길을 잘못 들어 마주한 뒷골목에서조차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그라피티를 발견했다. 이런 것만으로 쇼디치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인근 올드스트리트, 브릭 레인에 예술가와 산업 디자이너들이 모여들면서 '쇼디치 트라이앵글'이라는 이름 아래 '런던 디자인 축제'를 이끌고 있다. 이것도 쇼디치의 전부는 아니다.예술가의 창의는 또 다른 창의를 부른다. 세계 각지에서 IT 등 스타트업(신생 벤처) 회사 2000여곳이 몰려들면서 유럽의 IT 허브가 됐다. '테크 시티'란 이름도 그래서 붙었다. 미국 실리콘 밸리를 본떠 '실리콘 라운드어바웃'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최근 미국 라스베이거스를 IT와 문화 예술의 허브로 만들려는 '다운타운 프로젝트'도 쇼디치에서 영감을 받았다. 국내 기업 코오롱FnC가 얼마전 건대입구역 근처에 선보인 컨테이너 박스 쇼핑몰 '커먼그라운드'의 원조가 바로 런던 쇼디치의 '박스 파크'다.

(왼쪽)쇼디치 거리에서는 예술가가 장식한 벽화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오른쪽)쇼디치는 런던의 금융중심가인‘시티’에서 걸어서 10분이면 닿는 곳이다. 시티의 휘황찬란한 대형 건물이 도로 하나를 두고 쇼디치의 낡은 모습과 대비된다.

패션 디자이너 겸 작가 커스틴 앨리스는 "서로 다른 것들이 한곳에 모여 지금의 쇼디치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민자 문화가 모여 자연스럽게 이종교배(異種交配)가 되면서 새로운 문화가 창조됐다는 것이다.

"우린 세 번의 변혁기를 거쳤죠. 17세기 프랑스 신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오고, 20세기 들어선 유대인이 나치를 피해, 또 1960년대엔 방글라데시 이민자들이 '브리티시 드림'을 꿈꾸며 몰려들면서 문화의 다양성이 깊어졌습니다. 추방자와 저항가의 고향이라고 할까요. 셰익스피어의 정신적 토대 위에 이민자 문화가 더해지면서 어디서나 철학적 토론이 이뤄졌고, 뒷골목 카페와 펍 문화가 결집되면서 '어두운 가난의 도시'가 '불 꺼지지 않는 젊은 도시'로 바뀐 겁니다." 그는 '3C정신'이란 키워드를 부연했다. 소통(Communication), 공동학습(Co―learning), 연결(Connected)이다.

뒷골목 예술 완성하는 풀뿌리 힘

'전 세계 트렌드가 궁금하면 영국 쇼디치를 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각광받는 곳 쇼디치가 이렇게 융성하게 된 기간은 불과 15년 남짓이다. 고아 소년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그린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세밀하게 묘사돼 있듯 쇼디치는 빈민가와 폐허의 동의어였다. 악명 높은 살인마 '잭 더 리퍼'가 출몰할 만큼 어둡고 음험한 이미지였다.

과거 가난한 뒷골목의 상징이었던 런던 쇼디치는 영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디자이너·영화감독·작가들이 모여들며 세계 트렌드를 주도하는 곳으로 변했다. 쇼디치 골목에서 한 밴드가 유튜브에 올릴 영상을 찍고 있다.

싼 집값 덕에 예술가가 모여들면서 집단 창작의 터전이 됐고 가장 낙후된 동네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한 동네로 변했다. 현지에서 만난 시민들은 "주민이 모두 예술가이기 때문"이라 말했다. 쇼디치의 대표적인 부동산개발 회사 겸 갤러리 두 곳을 운영하는 레이첼 먼로-피블스씨는 "주민들에게 쇼디치에 대해 말해보라면 하나같이 셰익스피어 얘기부터 읊을 만큼 역사와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며 "글로벌 기업들의 지역 개발 회유에도 꿋꿋이 버틴 풀뿌리 지역민들의 힘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가난에 무릎 꿇고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을 때 그 지역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쇼디치 트러스트 재단은 레스토랑 수익을 지역에 환원하고 가난한 이민자들의 건강을 위해 무료 스파 시설 등을 선보였다. 지역 주민들이 '동네를 살리자'며 만든 비영리 단체다.

낙서를 예술로 승화한 쇼디치 그라피티의 정신도 여기서 나왔다. 도시 미관을 해치는 문화적 파괴행위라는 비판도 받는 그라피티가 이 지역에서는 주민이 예술가에게 그라피티 벽화를 의뢰할 만큼 환영받는다. '저항 예술가' 뱅크시를 비롯해 로아, 스틱, 벤 윌슨 등 유명 길거리 예술가들의 작품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 작품들을 설명하며 동네 투어를 하는 '얼터너티브 투어'도 등장했다. 한마디로 그 지역 출신 예술가가 '동네 자랑'을 하는 것으로, 어찌나 능변가들인지 2시간이 금방이다. 게다가 무료 관광이다. 관광객들이 내민 팁은 지역 예술가들을 위해 쓰인다고 한다. 쇼디치 얼터너티브 투어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벤은 "지역이 제 모습을 간직하면서 발전하려면 주민들의 지극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며 그러나 "런던의 마지막 보루 같았던 쇼디치에도 대기업 자본이 점차 침범해 들어오고 있어 아쉽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