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왜곡,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지 세계문화유산 등재,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혐한(嫌韓) 시위…. 반일감정이 어느 때보다도 드높을 때 양국이 국교정상화 50주년 행사를 치르며 한일관계의 향방에 또다시 비상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흥미 본위의 세계 여행 프로그램임에도 민감한 내용으로 가득한 한일관계의 어제와 오늘을 다룬 EBS ‘일본개항사’ 편이 온라인상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 22일(월)부터 3일간 방송된 EBS ‘일본개항사’ 편은 일본의 개항과 메이지 유신 이후 비약적인 성장, 그리고 팽창을 거듭하며 이웃 나라들을 수탈하다 패망하는 스토리를 담았다. EBS , KBS , MBC 등을 통해 친숙한 최태성 교사가 특유의 입담으로 쉬운 역사 해설을 선보였다.
◆ 한일관계의 민감한 곳만 골라서 찾아간 여행
야스쿠니 신사, 혐한시위대 현장, ‘지옥의 탄광섬’ 군함도 등 한일관계의 예민한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들을 골라서 찾은 것이 이 프로그램의 감상 포인트다. 한국인들에게 을사늑약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의 삶을 통해 개항사를 다룬 부분도 긴장감을 높인다. 역시 150여 년의 이야기를 풀어 가는데 거창한 내레이션 설명이 아닌 다채로운 체험으로 현장감과 이해도를 높였다.
그중 최 교사가 도쿄 긴자 거리에서 혐한시위대와 맞닥뜨려 봉변을 당하는 장면은 현재 SNS를 통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혐한 시위 도중 최 교사가 한국인임을 알아본 시위대는 최 교사를 향해 달려들며 욕설을 퍼부었다. 최 교사는 “도쿄 한복판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이런 일을 당해야 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혐한시위야말로 한일관계의 현주소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 최근 일본 정부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해 논란을 빚고 있는 나가사키의 군함도(軍艦島)에서는 일본 단체 관광 코스에 참여해 메이지 유신의 명과 암을 역설한다.
◆ 맹목적인 반일 감정 배제, 있는 그대로의 역사에 직면하다
이 프로그램이 일제 비판에만 국한되지 않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조선과 일본의 신문물에 대한 태도가 양국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최태성 교사는 “아무리 일본이라도 개항 때 배울 점은 배운다는 게 막연히 반일감정에 호소하는 흔한 시사물과 대비되는 지점”이라고 평가한다.
요코하마 개항장을 찾은 최태성 교사가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미용실에서 개항 당시에 유행했던 스타일로 직접 머리를 자르며 단발 등 서구 문물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태도를 대조한다. 일본의 청소년들과 스모시합도 흥미로운 감상 포인트다. 무분별한 해외 문물 도입에 맞서 일본은 어떻게 전통을 어떻게 보존해왔는지 몸으로 체험하며 한국사회에 시사점을 던진다.
프로그램을 연출한 허성호(33) PD는 “한일 간 역사 인식의 간극을 줄이는 출발점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역사에 직면하는 것”이라며 “한국사회의 역사교육 결핍이 즐거움과 교양이 가득한 역사기행으로 채워지길 희망한다”며 기획의도를 밝혔다.
한편 EBS ‘일본개항사’ 편은 오늘(27일) 밤 9시 5분부터 3부작 연속 방영된다.
▲제1부 ‘두 얼굴의 이토 히로부미’(27일 토 21:05 방송)
일본 야마구치현에 있는 시모노세키는 일본 최대의 복어 산지다. 1592년 임진왜란을 위해 16만 대군을 시모노세키에 거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복어를 잡아먹은 병사들이 자꾸 죽어나가자 복어 섭취 금지령을 내린다. 300년 동안 지속된 이 금지령을 폐지한 ‘복어 마니아’가 있었으니 그는 한국인이 가장 잘 아는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었다. 그는 청일전쟁에서 승리 후 패장인 청나라 리홍장 일행을 시모노세키의 복요리집 ‘춘범루(春汎樓)’로 불러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의 제1조는 ‘청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루지 못한 조선 정벌의 꿈을 이룬 이토 히로부미. 그의 가난한 빈농 집안에서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훗날 비약적인 신분 상승을 통해 일본 초대 총리에 오른다. 그가 공부했던 4평짜리 작은 서당에서 훗날 근대 일본의 산업화를 이끄는 고관대작들이 대거 배출됐다. 스승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 아래 이들의 공통적인 목표는 하나, 조선을 정벌해 아시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인기 역사교사 최태성이 이토 히로부미가 태어난 집, 청소년기의 집, 고관대작 시절의 집을 옮겨 다니며 그의 인생 역전 스토리 속에 숨겨진 일본 개항의 과정과 조선 침략 과정을 통시적으로 추적한다.
▲제2부 ‘화혼양재’(27일 토 21:35 방송)
돈가스와 단팥빵의 공통점은? 바로 개항의 시대에 일본이 개발한 발명품이다. 이른바 화혼양재(和魂洋才)를 기치로 외세의 문물들을 혼합해 일본의 것으로 창조했다. 도쿄 긴자의 렌가테이(煉瓦亭)는 신분제의 동요로 생계를 고민하던 한 사무라이가 요코하마 개항장에서 서양의 커틀릿을 일본식 덴푸라로 변형한 음식으로 문을 연 경양식집이다. 오늘 흔히 먹는 돈가스가 그렇게 탄생했다. 인근에 있는 단팥빵집 기무라야(木村屋) 역시 서양의 빵에 중국의 팥을 결합해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요코하마 개항장을 방문한 역사교사 최태성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이용원을 찾아 당시 유행했던 이른바 ‘잔기리’ 스타일로 변신하며 당시 ‘모던보이’들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또한 청소년들과의 스모 대결을 통해 개항 이후 보혁 갈등에 대해 알아보고 스모, 기모노 등 일본 고유의 전통이 급격한 개항에도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를 추적한다.
▲제3부 ‘제국주의의 그림자’(27일 토 22:05 방송)
일본의 개항과 메이지유신은 일본을 아시아 최강국의 반열에 올렸지만 세계인에게 커다란 불행과 상처를 안겨주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도쿄 긴자 거리에 쇼핑을 나온 역사교사 최태성은 인종차별로 악명 높은 재특회의 혐한시위대와 마주친다. 한국인임을 금세 알아본 시위대는 심한 욕설을 퍼부으며 달려든다. 경찰의 제지 덕분에 최악의 사태를 면했지만 최 교사는 아직도 남아있는 일본 제국주의의 망령을 생생히 경험한다.
최근 일본정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메이지 시대의 산업 발전 흔적들은 이웃 국민들을 강제징용한 범죄의 현장이다. 대표적인 것이 ‘지옥의 탄광섬’ 군함도(하시마)다. 일본이 만들어놓은 관광 코스로 군함도를 둘러본 최태성은 메이지유신의 발전과 팽창이라는 양면성을 설명하고 자신들의 발전상만 기억하려는 일본인들의 역사인식에서 경색된 한일관계의 시발점을 찾는다.
개항 이후 일본의 팽창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야스쿠니 신사다. 일본의 무모한 야욕이 불러온 태평양전쟁, 이를 서양의 압제로부터 아시아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한 ‘대동아전쟁’이었다고 선전하는 야스쿠니 신사와 이에 동조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에서 최 교사는 개항 이후 150년간 벌어진 한일 양국의 역사인식 사이에 좁히기 어려운 거리차이를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