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30일 오전 9시 경기도 용인 경찰대 체육관. 몸에서 뿜어내는 기(氣)가 범상치 않은 젊은 남녀 125명이 속속 들어섰다. 눈빛은 예리했고, 손동작과 걸음걸이 하나에서도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내공의 실체는 곧 드러났다. 태권도 5단의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 유도 5단의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검도 6단의 세계선수권대회 동메달리스트….

이들은 경찰이 11년 만에 뽑는 무도(武道) 특별채용에 응시하러 온 전·현직 태권도·유도·검도 선수들이었다. 1차 서류 심사 통과 후 실기시험을 보기 위해 이날 경찰대 체육관에 모인 것이다.

그래픽= 김성규 기자

응시자들의 경력은 화려했다. 41명이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 등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딴 사람들이었다. 나머지 84명도 각종 국내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는 고수(高手)들이었다.

본격적인 실기시험에 들어가자 체육관은 거대한 무술 경연장으로 변했다. 태권도 유단자들의 발차기는 현란했고, 검도 무인(武人)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유도인들은 순간적인 힘과 움직임으로 상대방을 잇따라 매트에 꽂아버렸다. 시험을 참관한 한 경찰은 "진정한 무인들의 경지를 직접 봤다"며 "이런 분들이 경찰에 합류하게 돼 정말 다행이다"고 말했다.

무술 고수들, 경찰에 투신하다

"앗, 이 선수도 경찰이 된 거야?"

경찰청이 지난 9일 발표한 순경(9급) 무도 특채 최종 합격자 명단에는 일반 시민들도 잘 아는 국가대표 출신 간판 스타들도 포함됐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태권도에서 금메달을 딴 임수정(29) 선수, 한국 여자 유도 최초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하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정경미(30) 선수, 2006·2010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유도계의 '기둥' 황희태(37) 선수, 제15회 검도 세계선수권대회 은메달리스트 김완수(33) 선수 등의 이름도 보였다.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딴 사람이 20명이었다.

경찰청 교육정책담당관실 김정인 경위는 "지원자 명단을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다. 이렇게 유명한 선수들이 몰려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무도 특채는 3단계 전형을 거쳐 선발됐다. 지난 3월 채용 공고가 나자 전국에서 492명이 몰려 9.8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 중 서류 전형을 통해 126명을 뽑았고, 이들을 대상으로 2차 실기시험과 3차 면접을 통해 최종 합격자 50명을 가려냈다.

이번 무도 특채는 지원 자격으로 '전국 대회 우승 이상' 경력을 내걸었다. 하지만 무술 단수가 높다고, 과거 수상 경력이 대단하다고 합격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경찰청 관계자는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땄지만 결국 떨어진 사람도 30명이나 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메달은 참고 자료에 불과했다. 지금 당장 최고의 무도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느냐가 중요한 선발 기준이었다. 태도나 인성 등이 경찰 업무에 적합한지도 면밀히 따졌다"고 말했다. 메달리스트 출신의 한 합격자는 "무도계는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편인데 이번엔 후배들이 선배라고 봐주는 것 없이 공격적으로 나와 내심 당황했다"고 말했다.

이번 합격자들이 특히 주목을 받는 이유는 이전 특채 합격자들과 달리 현장 사건 해결과 범죄인 검거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합격자들은 오는 8월 순경으로 임용돼 중앙경찰학교에서 34주 교육을 받는다. 이후 1년간 지구대·파출소에서 근무한 뒤 5년 동안 강력·수사 부서에서 의무 복무하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 2002년 개봉된 영화 '공공의 적'에서 주인공 강철중 형사는 아시안게임 복싱 은메달리스트 출신으로 설정됐다. 그는 막강한 '실력'으로 강력범들을 제압했다. 이처럼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조폭 때려잡는 메달리스트'가 우리 현실 세계에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임수정씨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해서 무조건 붙는다는 생각은 버리고 평가에 임했다"며 "아무리 거칠고 위험한 현장에 투입된다 해도 두렵지 않다. 바르고 깨끗한 경찰이 되겠다"고 했다.

여자 취객 하나 제압 못하는 경찰?

무도인 특별 채용은 1980년대까지는 아주 극소수 인원에 한해 비공식적으로 이뤄졌다. 알음알음으로 채용했기 때문에 그런 채용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정식 특채가 시작된 것은 1994년 순경 7명을 뽑으면서다. 당시 합격자 중엔 1988년 서울올림픽 여자유도 부문 동메달리스트 박지영(45) 선수도 있었다. 그는 제1호 메달리스트 출신 경찰이다. 현재 경위 계급인 그는 충주경찰서에서 학교폭력 전담 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렇게 무도 특채가 도입되긴 했지만 채용은 비정기적으로 이뤄졌다. 1997년에 순경 1명을 뽑았고, 1998년엔 이례적으로 전국대회 3위 이상, 체육학 학사 이상 등의 조건을 갖춘 무도 특기자 14명을 경장으로, 무도 4단 이상 자격자 283명을 순경으로 선발했다. 1999년엔 순경 1명을 뽑았고, 5년 후인 2004년에 다시 3명을 순경으로 뽑았다. 당시 2000년 시드니올림픽 태권도에서 금메달을 딴 이선희 선수와 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김선영 선수, 2003년 세계 태권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딴 윤현정 선수 등이 특채됐다. 이들 이후 무도 특채가 시행되는 건 이번이 11년 만이다.

경찰이 한동안 무도 특채를 실시하지 않은 까닭은 경찰 인기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말 IMF 외환 위기 이후 경찰 채용 공고가 날 때마다 엄청난 지원자가 몰렸다. 작년 2차 순경 공채 때 광주지역 여경 경쟁률은 101대1을 기록했다. 경찰 관계자는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무도 특채는 특혜'라는 여론도 생겼고, 무도 특채를 하지 않아도 명문대 출신의 우수한 자원이 몰렸기 때문에 특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반전은 2013년 12월 일어났다. 음주운전 단속 중이던 남자 경찰관 2명이 만취한 여자 프로 골프 선수에게 폭행을 당한 것이다. 당장 "요즘 경찰 약해 빠졌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경찰 내부에서도 "약한 경찰이 어떻게 현장에서 범인을 잡느냐"는 자성이 일었다. 경찰 관계자는 "이런 분위기가 바탕이 돼 작년 무도 특채 부활을 검토하게 됐다"고 말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실제로 그간 경찰이 약체화(弱體化)됐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메달리스트를 포함한 '무도 고수'를 대거 채용함으로써 '약골 경찰'의 이미지를 벗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 내부에서는 무도 특채 인력이 일선 경찰들의 '실전 능력'을 향상시키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경찰청의 한 간부는 "무도 고수들은 현장에서 범인을 제압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실전 기술을 전수하는 '현장 교관' 역할도 하게 될 것"이라며 "'교과서 무술'이 아니라 현장에서 동료와 사건을 해결하며 배우는 살아 있는 무술이 전파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제2의 인생' 시작하는 무도인들

국제대회 메달리스트들이 순경 특채에 몰린 현상이 국내 체육·무도인들의 어려운 현실을 보여준다는 지적도 나온다. 메달을 따도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 무도 특채 지원자는 "세계 정상급 실력을 지닌 선수들이 경찰 실기 시험장에 나와 기합 지르고 구슬땀을 흘리는 걸 보니 안쓰러웠다"고 말했다.

지난해 본지와 대한체육회는 엘리트 체육인 66명을 대상으로 '은퇴 후 10년'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스포츠 관련 직종(코치, 체육 교사, 스포츠 시설 운영, 스포츠 행정직)에 근무하고 있는 응답자는 26명(39%)에 불과했다. 코치로 일하고 있다는 11명 중에서도 10명이 비정규직이었다. 제약회사 영업사원, 자동차 생산 근로자, 제철소 크레인 기사 등으로 일하는 체육인도 있었다. 이번 메달리스트 합격자 20명 중 14명이 석사학위 소지자였다.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도 있었다. 한 무도 특채 지원자는 "학위를 취득해도 각급 학교에서 지도자·교수가 될 확률이 극히 낮기 때문에 경찰에 지원한 것"이라고 말했다.

최동호 스포츠평론가는 "이번 경찰 무도 특채는 초등학생 때부터 운동에만 몰입시키는 한국 엘리트 체육 교육의 고질적 문제를 드러냈다"고 말했다. 엘리트 체육·무도인들이 전공과 다른 진로를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회·교육 시스템이 없다 보니, 갈 곳을 찾지 못한 무도인들이 특채 공고가 뜨자 한꺼번에 몰렸다는 것이다.

이번 경찰 무도 특채는 엘리트 체육·무도인들의 진로 지평을 넓혀준 계기가 된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이대택 국민대 체육학과 교수는 "경찰은 무도 엘리트 선수들이 적성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직장으로 볼 수 있다"고 했고, 황희태씨 역시 "날렵함과 속도를 중시하는 유도의 특성이 경찰 실무에서 큰 장점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