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서울 정동에 '보구여관(保救女館·여성을 보호하고 구하는 곳)'이란 이름의 병원이 세워졌다. 고종 황제가 직접 지어 내린 이름이었다. 보구여관은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을 위해 만들어진 병원으로, 윌리엄 스크랜튼 목사가 제안하고 감리교 여의사인 메타 하워드가 병원을 설립했다. 현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전신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한국 간호 112년의 역사가 시작됐다. 서구에서는 1860년 나이팅게일에 의해 첫 정규 간호 교육 과정이 시작됐고, 이후 43년이 지나 한국에서도 간호교육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대한간호협회 김옥수 회장은 "1903년 12월 보구여관에 우리나라 최초 간호원 양성소가 만들어졌고, 미국 미시간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마거릿 에드먼즈가 초대 교장으로 간호학생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며 "5년 뒤인 1908년 11월 5일 졸업한 이 그레이스와 김 마르타라는 두 명의 학생이 한국인 최초의 간호사"라고 했다. 같은 해 6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의사 7명이 배출돼 1908년은 한국 의료계에서 역사적인 해가 됐다.
에드먼즈는 'Nurse'의 한국어 명칭인 '간호원'이란 단어를 만들었다. 책임감 있게 돌본다는 의미를 갖는 간(看)과 돕거나 보호한다는 의미의 호(護)자를 합쳐 만들었다. 일제시대에는 간호부라고 불리기도 했고, 1987년 간호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한국에 들어온 첫 선교 간호사는 1891년 내한한 영국 성공회의 히드코트였다. 그녀는 서울 정동의 병원과 부인들을 위한 진료소에서 5년간 활동하다가 귀국했다.
김옥수 회장은 "서울 세계간호사대회가 열리는 올해는 우리나라 간호 역사를 연 에드먼즈 타계 70년이기도 한 뜻깊은 해"라고 말했다. 대한간호협회는 특별행사로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씨와 함께 에드먼즈가 디자인한 우리나라 첫 간호복을 고증·복원하기도 했다.
한국 간호 112년의 역사는 한국 근대사의 역사이기도 하다. 현대사의 중요 순간마다 간호사들은 빛을 발했다. 일본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들도 많았다. 1919년에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에 소속된 여성 4명이 독립운동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1914년부터 1944년까지 서울과 평양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간호사도 28명에 이른다.
여군(女軍) 역사도 간호사의 역사이다. 여군은 1948년 5월 제1육군병원 창설과 함께 그해 8월에 간호장교 후보생 임관으로 시작됐다. 간호장교 후보생 1기로 31명이 배출됐다. 간호장교들은 6·25전쟁 중에도 부상병 처치 등 많은 역할을 했다. 국군간호사관학교는 외국에서 보기 드문 간호장교 양성소이다.
한국 근대화의 역군도 간호사들의 몫이었다. 1963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가 1만1000여명에 달한다. 간호사와 광부들이 고국에 송금한 1억달러는 당시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2%에 미칠 만큼 큰 액수였다. 경제 개발을 위해 단돈 1달러도 아쉬웠던 시절에 간호사들의 독일 파견은 한국 경제 도약의 밑거름이 됐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 간호 역사를 되돌아봄으로써 우리 간호계가 열어갈 새로운 미래를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이번 세계 간호사대회를 맞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 한국 간호 112년 역사를 소개하는 테마관을 꾸몄다. 한국 간호의 근원을 되새기고, 도전과 용기로 근대사를 개척한 선배 간호사들을 기억하는 자리다.
대한간호협회는 한국 간호사들이 지난 100년을 넘어 앞으로의 100년간 국제 사회 간호를 발전시키는 데 더 기여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고 있다. 서순림 부회장(경북대 교수)은 "우리나라는 1949년 국제간호협의회 정회원국으로 가입한 뒤 국제 간호계의 일원으로 기여해왔다"며 "이번 대회를 통해 우리나라 간호사들도 세계 간호사의 동향과 정보를 교류하며 글로벌 시민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