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의 마지막. 청년들을 유혹해 죽여버리는 밤의 악령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알브레히트는 악령들을 소멸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크리스털 조각을 움켜쥐지만 아뿔싸, 그 무리에는 사랑하는 여인 지젤의 악령도 있다. 살아남으려면 지젤까지 쫓아버려야 한다. 지젤은 알브레히트를 용서하며 스스로 사라져버리고, 홀로 남은 알브레히트는 회한에 잠긴다. 진한 감정의 물이 무대 위에 고인다.

호주 안무가 그램 머피와 유니버설 발레단이 만나 지난 13~17일 초연한 발레 '그램 머피의 지젤'은 사랑과 배신, 절망과 용서가 곡선과 직선으로 넘실댔다. 고전발레 '지젤'을 재해석한 작품인 만큼 줄거리는 익숙한 고전을 닮았다. 아름다운 처녀 지젤은 청년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에겐 약혼녀가 따로 있다. 뒤늦게 그걸 안 지젤은 괴로워하다 죽고, 그녀의 영혼을 불러들인 악령들의 여왕 미르트는 알브레히트를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2막 중 알브레히트(콘스탄틴 노보셀로프)와 지젤(황혜민)의 2인무.

1841년 처음 나온 고전 '지젤'과 다른 점은 우선 음악이다. 기존 곡 대신 모든 곡을 새로 만들었고, 세산조시·엇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 등 휘몰아치는 우리 가락을 끼워 넣어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한국의 수묵화가 담긴 무대미술은 그윽하고,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서양 악기와 포개진 가야금, 징, 꽹과리, 북, 장구는 흥겨움을 더했다.

황혜민(지젤)은 순진한 처녀와 슬픔을 머금은 악령 두 캐릭터를 실감나게 그려냈다. 하지만 1막에서 지젤, 알브레히트, 지젤을 짝사랑하는 청년, 알브레히트의 약혼녀 이렇게 네 명이 모여 서로 다투고 맞서는 장면은 아쉬움이 남았다. 각자 느끼는 배신감, 좌절, 질투, 분노를 엇갈린 4인무로 표현하려는 듯했으나 안무가 복잡하게 엉킨 탓에 감정선을 온전히 살리지 못했다.

고전 '지젤'은 극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낭만 발레다. 악령들의 춤까지 아름답게 그린다. 하지만 이 작품 2막에서 악령들이 알브레히트를 둘러싸고 토해내는 군무(群舞)는 각지고 날카로웠다. 몇몇 유명한 레퍼토리만 되풀이해 올리는 게 국내 발레계의 현실이기에 유니버설 발레단의 과감한 모험이 더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