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음모
존 그리샴 지음 | 안종설 옮김
문학수첩 | 528쪽 | 1만4000원
전작 '속죄나무'에서 보인 존 그리샴의 방향타 전환 양상은 신작 '잿빛 음모'에서도 고스란히 관찰된다. 구체적인 사건을 중심에 놓고 예측불허의 치밀한 공방을 벌이던 초기작에 익숙한 이라면 사뭇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 이제 그는 미시적 사건보다는 그 이면에 자리한 부조리한 사회구조 전반을 담아내는 데 집중하기로 단단히 작정한 낌새다. 그의 독보적인 장기로 기능해 온 박진감과 속도감을 일정 부분 희생해서라도.
'잿빛 음모'는 미국 석탄 재벌의 초법적 행태를 핵심 소재로 삼고 있지만 고발의 대상은 한결 광범위하다. 재벌, 법조계, 의학계, 정계 등 각계 엘리트층의 담합 실태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또한 스릴러 본연의 긴장감을 자아내는 굵직한 특정 사건 대신 똘똘 뭉쳐 사익을 추구하는 엘리트층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 개개인의 이야기를 서사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작가 자신의 새로운 노선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고 있다는 특징도 있다. 마구잡이 노천 채굴과 석탄 분진으로 인한 극심한 환경오염, 채굴 과정에서 발생한 낙석에 의한 민간인 인명 피해, 흑폐증과 암으로 신음하지만 보상 없이 죽어가는 광부들, 막강한 자본 앞에 헐값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사람들의 현실을 심층 취재를 기반으로 생생히 담아냈다.
작가의 방향타 전환은 여주인공 서맨사의 캐릭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에겐 법정 스릴러물 주인공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투철한 신념이나 저돌적 추진력, 기발한 재치 등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건 금융 위기로 인해 대형 로펌 변호사에서 비영리단체 무급 인턴으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인 고뇌들이다. 사건 전개에서도 주도적으로 의견을 이끄는 면모보다는 관찰자 입장이 두드러질 만큼 수동성이 강한 이례적인 주인공이다. 마찬가지로 석탄 재벌과 적극 맞서 싸우는 동료 변호사 도너번 역시 절대적으로 선한 인물로 그려지지 않았다. 소송 펀드와 영합해가면서까지 사건의 규모를 최대한 키우려는 면모에서는 변호사들의 극단적 사익 추구 현황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 시선이 은근슬쩍 노출된다. 이야기의 얼개가 단순한 선악 구도로 짜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명시적인 2부 구성은 아니지만 작품은 정확히 300페이지 마지막 문장을 기점으로 두 부분으로 분할된다. 전반부는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부조리의 양상을 꼼꼼하게 그려내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언제나 세세한 디테일을 무기로 삼은 존 그리샴이지만 이번엔 그 정도가 한층 더해서 소설의 형태를 한 르포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후반부에선 작가 본연의 속도감 있는 사건 전개가 좀 더 도드라지며 주인공이 내적으로 성장하는 모습도 곁들여진다.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사회 '구조'에 대한 이야기만이 가득하다. 가장 큰 사건 역시 개인의 역량보다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해결되고 이는 기존의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그간의 그리샴 작품에 그의 시선과 세계관이 드러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토록 전면적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는 법정 스릴러라는 방식을 통해 사회의 해부도를 그려내고자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미국 현지에서는 이를 두고 정치색 운운하는 견해가 오가는 현황인데, 염두에 두고 읽으면 또 하나의 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