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공포가 커지고 있다. 사망자가 생기고, 격리대상자가 늘면서 온라인과 SNS 등에 온갖 루머와 괴담이 넘쳐 난다. 이 와중에 정부와 박원순 서울시장이 메르스 대응을 놓고 공개충돌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국민은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지금 이 시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판단, 지난 3월20일 인천지법 문유석 부장판사가 ‘프리미엄조선’에 기고한 글을 다시 싣는다.


문유석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

작년 여름, 에볼라 바이러스가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던 시절, 33세의 젊은 미국인 의사 켄트 브랜틀리 박사는 철수하자는 제안도 거절하며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에볼라 감염 환자들을 치료하며 의료 봉사 활동을 계속하다가 결국 에볼라에 감염되고 말았다. 한데 미국 본토 역시 에볼라에 대한 공포가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토머스 프리든 소장은 브랜틀리 박사를 비롯한 자국민 감염자를 미국 본토로 송환하여 치료하기로 결정한다. "왜 감염자를 미국으로 데려오느냐"는 비난이 쇄도하는 가운데 토머스 프리든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사람들의 우려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낯선 것에 대한 공포가 우리의 연대감을 이길 수는 없다."

이후 켄트 브랜틀리 박사는 극적으로 완치되었지만, 토머스 프리든은 계속 위기를 맞았다. 미국 내 감염자 및 사망자가 발생하여 유행병처럼 공포가 번져가면서 서아프리카와 미국 사이의 여행 금지조치 등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난 여론 및 사임 압력이 고조되었다. CDC 및 일선 병원 직원들의 업무상 실수가 발생하여 이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공화당 의원 두 명이 책임을 지고 프리든이 사임하라고 요구한 상태에서 의회는 청문회를 개최하여 프리든에게 날선 공격을 퍼부었다. 프리든과 오바마 행정부가 가장 비판받은 것은 서아프리카와 미국 사이의 전면적 여행 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는 점이었다. 워싱턴포스트의 여론조사 결과 미국인의 3분의 2는 전면 금지에 찬성했다. 하지만 프리든은 여행을 금지해도 어차피 들어올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들어올 것이므로 오히려 에볼라 바이러스를 추적하기 더 어려워진다며 여행 금지는 과학적으로 합리적인 방어수단이 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프리든의 차분하고 논리정연한 대답이 이어지자 청문회 분위기도 차분해졌고, 일부 의원들은 "더 도울 것은 없느냐"는 질문으로 질의를 마쳤다. 토머스 프리든은 이후에도 여론의 압력에 따른 급선회를 하지 않은 채 CDC를 이끌고 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이런 태도는 프리든만의 것이 아니다.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 환자를 치료하다가 귀국하려던 미국인 간호사 케이시 히콕스는 에볼라 바이러스 음성 반응 확인을 받았고 아무런 증상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뉴저지주 뉴어크 공항에서 4일간 강제 격리 조치를 당한 후, 다시 거주지인 메인 주로 옮겨져 에볼라 잠복기에 해당하는 21일 간의 자택 격리 조치를 받았다.

히콕스는 이러한 조치는 의학적인 근거가 없는 피어볼라[공포(Fear)와 에볼라(Ebola)의 합성어]로 인한 인권 침해라고 반발하며 남자 친구와 함께 집 밖으로 나가 자전거를 탔다. 메인 주 당국은 주 법원에 강제 격리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구했다. 국민 여론은 강제 격리를 지지했다. 뉴욕에서 시행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2%는 에볼라 환자와 접촉한 의료진은 증상이 없어도 21일간 강제 격리해야 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메인 주 법원은 강제 격리 조치 신청을 기각했다. 이유는 전문적인 의학적 판단의 존중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에볼라 바이러스는 잠복기에는 전염이 되지 않는다. 에볼라 증상 발현 전까지는 감염력이 없으며 발열 시작 후 하루나 이틀 뒤에 비로소 감염력이 나타난다. 따라서 무증상 의료진에 대한 강제 격리는 의학적 근거가 없고, 이러한 조치는 서아프리카 에볼라 환자에 대한 의료 활동을 크게 위축시켜 사태의 근본적 해결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메인 주 법원 찰스 레베르디 판사는 판결문에서 "히콕스는 확고한 과학적 근거 없이 누군가의 헌법적 권리를 침해하는 조치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은 공포에 치우쳐 행동하지만 이 공포는 전적으로 이성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비전문가인 나로서는 토머스 프리든 및 미국 정부 책임자들의 에볼라 대응이 최선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를 할 능력은 없다. 내가 주목한 것은 이 낯선 것에 대한 무시무시한 공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프리든과 메인 주 법원 판사가 보여준 자세였다. 자신의 판단이 잘못될 경우 수백 만 이상의 국민이 죽어갈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다. 그리고 공포가 전국민을 사로잡고 있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여론의 형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최고의 전문가라고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그 과중한 책임의 무게에 짓눌린 채 여론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이 대부분의 인간의 본능 아닐까.

우리 사회를 배경으로 상상해 보자. 국민 여론의 82%가 찬성하는 긴급한 조치가 있다. 그것도 국민 생명, 건강에의 위협이라는 심각한 공포를 이유로 한다. 과학계의 판단은 근거 없는 공포라며 반대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의견이 꼭 100% 정확하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며 국민 여론은 여전히 들끓는다. 그리고 모든 사안에는 반드시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극소수 비주류 학자, 재야 전문가들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이에 대해 주류 과학계에서 검증한 결과 그건 근거 없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음모이론은 횡행한다. 더 나아가, 당시로서는 최선의 과학적 근거에 따라 그 조치를 거부하였는데, '블랙 스완(극단적으로 예외적이어서 발생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사건)'에 해당하는 예측할 수 없었던 결과가 발생하여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만 경우, 결정 당시로서는 최선의 결정이었으므로 법적 책임은 물을 수 없다는 결론을 우리 사회가 수용할까?

낯선 것에 대한 공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미국 사회가 보여준 것은 과학적 판단을 존중하는 합리주의, 여론의 눈치를 보며 자기 살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떤 비난을 받더라도 자기 직책이 부여한 책임을 이행하는 전문가들, 공포가 급증하고 담당자들의 실수가 발견되는 상황에서도 함부로 책임자 및 대응방식을 바꾸지 않는 시스템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단 한 명의 자국민도 버리지 않겠다는 강력한 연대감이다. 한 사회의 위대함은 위기 속에서 비로소 분명히 모습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