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인 15일 오후 서울 노원구 청원여고 1학년 4반 교실. '스승의 은혜 감사합니다'라고 적힌 칠판 앞에 탈북자 김향춘(45)씨가 섰다. 교단에 선 그의 눈은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이게 대한민국에서 하는 내 첫 강의"라고 운을 뗀 김씨는 "여러분을 보니 북한에 남겨 놓은 자식 같은 제자들이 생각난다"고 했다.
김씨는 한국에 오기 전에 12년(1992~2003년)간 북한의 고등중학교(중고등 과정 통합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당시는 북한에 불어닥친 '고난의 행군' 시기였다. 김씨는 "그 시절 북한 학생들은 낮에 나물 캐고 나무하러 갔다가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학교에 오곤 했는데 수업 시간에 배가 너무 고파 바로 앉아 있지도 못했다"고 했다. 김씨는 그런 학생들을 두고 2003년 돌연 중국으로 갔다. 남편이 의료 사고로 사망했는데, 북한 고위층이 대충 무마해버려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김씨는 "떠나면서 마음에 가장 걸렸던 것은 내가 가르쳐온 학생들이었다"며 "북한의 고등중학교는 교사가 한 학급을 맡으면 6년간 함께 지내는데, 다시는 못 보겠다고 생각하니 자식을 잃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이날 청원여고는 남북교사통일연구회와 함께 북한에서 교직에 몸담았던 탈북자 26명을 일일교사로 초청했다. 김씨는 이날 12년 만에 학생들을 마주하고, '북한 생활과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가르쳤다.
탈북 교사들은 수업에 앞서 강당에서 카네이션 수여식에 참석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북한의 '스승의 노래'가 울려 퍼지자 김씨는 "북한 TV 드라마 '공부는 계속되어야 한다'의 주제곡"이라며 "이 노래를 들으니 늘 배고파 했던 제자들이 다시 떠오른다"고 했다.
이날 교단에 선 다른 탈북 교사들도 한결같이 "북한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 그립다"고 했다. 2007년 탈북한 김순실(69)씨는 청원여고 교내 곳곳에 있는 컴퓨터와 피아노를 보면서 "35년이나 고등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지만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보여준 적도 없는데 여기선 아이들이 쉬는 시간마다 피아노를 친다"며 부러워했다. 이어 "북한에서는 컴퓨터 하나를 사려면 학생을 총동원해야 한다"며 "1000명이 5kg씩 도토리를 따서 가져오는 과제를 준 적이 있는데 교사로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했다. 2004년 탈북한 최옥(48)씨는 "학교에서 교사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으니까 학부모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내게 줬다"며 "항상 배움에 목말라했던 아이들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날 행사를 기획한 고려대 북한학과 조휘제(66) 강사는 "교사 출신 탈북자들이 입버릇처럼 '다시 교편을 잡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 앞에 다시 설 기회를 드리고 싶었다"며 "하루나마 소원을 풀어드린 것 같아 기쁘다"고 했다. 이 가운데 일부는 한국에 와서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 경기 안성의 한겨레 중·고등학교 등에서 탈북 청소년들을 교육하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각 반의 일일 교사들은 학생들을 안아줬다. 1학년 김예은양은 "선생님이 내 명찰에 적힌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말해주시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고 했다. 1학년 박민주양은 "탈북자라면 막연히 먼 나라 사람처럼 느꼈었는데 선생님들의 제자 사랑은 다 같고 큰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