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만 해도 일본 도쿄의 한인타운 신오쿠보(新大久保)의 한식당에는 한국인보다 일본인 손님들이 훨씬 많았다. 2003년 NHK를 통해 방영된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 내 한류의 기폭제가 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기자가 2010년 들렸던 이 곳의 한 비빔밥 전문점은 일본인 손님이 90%가 넘었다. 한국식 김밥을 파는 또 다른 가게에는 당시 한국보다 서너 배 이상 비싼 가격에도 일본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노골적인 우경화로 반한(反韓)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이곳의 한류 상권도 얼어붙고 있다.
지난 4일 여의도에서 만난 이지평(52)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신오쿠보가 혐한 시위를 벌이는 이들의 주무대가 되면서 한류 관련 상권이 죽었다고 했다. 여기에 더해 국영 방송인 NHK의 편성 담당자들도 친(親) 아베 성향 인사들로 속속 교체된 것도 한 때 뜨거웠던 ‘한류의 종말’을 가속화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1.5세로 국내 대표적인 일본 전문가 중 하나다.
-한류콘텐츠의 인기는 역사문제 등으로 뻑뻑해지기 쉬운 한일관계의 수레바퀴가 잘 돌아가도록 기름칠을 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제 한류현상도 예전같지 않아 보인다.
“아베 정권 출범 이후 한류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혐한시위로 신오쿠보의 한인 상권이 타격을 받으면서 한류스타 공연도 줄었고 그 자리를 동남아시아 출신 스타들이 조금씩 메우고 있다. 자민당의 관련 정책을 언론에서 비판하면 ‘균형보도’를 들먹이며 문제 삼고 있어 언론의 한류 관련 보도도 위축됐다.”
-아베 총리가 원래 우파 성향이기도 하지만 경제상황과 국내 정치도 우경화를 부추기고 있는 것 같다.
“일본 경제가 회복기에 접어들었다고 하지만 아직 재정적으로 허약하다.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일부 강한 목소리가 전체를 대변하는 것 처럼 비춰질 수 있다. 혐한시위를 벌이는 이들은 극히 일부지만 대단히 많아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경기후퇴와 디플레이션으로 점철된 '잃어버린 20년'의 골이 워낙 깊은 탓에 아베노믹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높아진 것도 아베 정권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일본은 미국에 올인하고 있는 느낌이다. 반면 중국은 역사문제에 영토문제까지 더해 우리나라 못지 않게 일본과 껄끄러운 상황이다. 이로 인해 중국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일정부분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일관계 회복이 여전히 중요한 이유는 뭘까.
“중국은 아직 초강대국이 아니다. 10년 안에 미국을 위협할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있지만 그 과정에서 군사력 강화와 우주과학 기술 발전 외에도 금융시장 자율화와 위안화 위상 제고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그 사이에 우리나라가 겪었던 IMF사태와 같은 ‘중진국의 위기’를 겪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관계가 회복되면 한미관계와 한중관계의 중간 지점에서 어느정도 견제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일본 경제가 예전같지 않다고 하지만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으로서 어느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잠재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정보기술(IT) 산업이 급부상하면서 제조업의 IT 융합도 가속화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차세대 제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데 한일 두 나라가 함께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TPP 가입해도 자동차 산업 큰 타격 없을 것”
-일본과 껄끄럽기로는 중국도 우리 못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 아베 정부가 일본 기업인들에게 원성을 듣는 것도 그 때문이다. 중일관계가 경색되면서 우리가 중국 시장에서 반사이익을 누린 것은 맞다. 중국에서 현대차가 도요타를 비롯한 일본 자동차 업체에 앞설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상황적 도움이 컸다.
하지만 지난달 중일 정상회담에서의 분위기 변화에서도 느껴지듯 두 나라 사이의 관계도 변화 가능성이 있다. 자칫하다가 우리만 왕따가 될 수도 있다.”
-올해 말 중국의 주도로 세워질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대한 일본의 입장은 어떤가?
“일본 내에서도 (일본이 가입을 안 한 것이)외교적 실수였다는 의견도 있고, 안하는 게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외교실수로 보는 쪽이 우세해 보인다. 중국이 일본에 이사국 지위를 제안했는데 미국 눈치를 보다가 막판에 서구 선진국들이 대거 참여하니까 ‘아차’ 했을거다. 지금 가입해도 이사국 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본은 원래 결정이 느리기 때문에 금방 가입한다고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들어가서 견제하자’는 쪽이 힘을 얻고 있는 것 같다.”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고 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우리나라가 가입하는 것에는 어떤 입장인지?
“결국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이 되는 거니까 TPP 구도에서 FTA를 잘 하면 향후 한중일 FTA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TPP에 가입할 경우 자동차 등 일부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일본에 밀리면서 타격을 입을 것으로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그래도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TPP협상 과정에서 미국도 일본 자동차 산업을 견제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우리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 우리나라에서 경쟁력이 있는 일본 자동차는 이미 상당부분 들어와 있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 만큼 큰 영향은 없을 것이다.”
-한 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일본 정보기술(IT) 업체들이 세계시장에서 맥을 못추고 있다. 일본 IT산업의 미래는 어떻게 전망하나.
“지난해 말부터 일본 가전업체의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내년에는 어느정도 수익 개선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TV와 스마트폰 부분은 여전히 어렵지만 백색가전은 자국 시장에 특화된 기술이 필요한 만큼 고급화 통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이 높은 만큼 네비게이션 등 자동차용 전자제품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이 연구원은 1963년 도쿄에서 태어나 일본 호세이대(법정대) 경제학과와 고려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원에서는 다국적기업의 발전이 민족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며 경제와 기업관련 이슈 양쪽을 모두 섭렵했다. 저서로는 ‘일본형 자본주의’, ‘일본에서는 일본식으로’, ‘미래경영 글로벌경영’ 등이 있다. 한국에 온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말투에는 일본 억양이 묻어났다.
-과거 일본 경제가 한참 좋을 때는 '도쿄만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일본 기업들이 세계를 주름잡으면서 미국 언론들은 금방이라도 일본이 미국을 집어삼킬 것 같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랬던 일본 경제가 어느덧 신용등급이 우리보다 두 단계나 낮아질 정도로 추락했다(국제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달 27일 일본의 국가 신용등급을 기존 A+에서 A로 한단계 강등했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건가?
“1988년 일본 경제가 호황기를 누리던 시절에 LG경제연구소(당시 럭키금성경제연구소)에 공채 1기로 들어갔다. 일본 경제 구조를 잘 알고 있던 탓에 당시에도 불안요인이 보였다. 무엇보다 1인당 생산성에서 미국과는 큰 격차가 있었다. 일본시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이 성장하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조업의 경우 국가 간 비교우위가 계속 변하기 때문에 중국이나 인도 등 새로운 국가가 생산력을 갖추고 성장하면 이를 적절히 활용하고 견제하며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갈라파고스’라고 불릴 정도로 자국 내에서만 효율적인 일본 경제는 그렇지 못했다.”
◆ ‘유교 자본주의’ 한계 직면한 일본…효율적인 기업문화 절실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PC산업의 경우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일본은 NEC를 중심으로 세계를 호령했다. 미국 업체들이 단가를 낮추기 위해 해외로 생산시설을 옮기자 일본도 맞대응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가 글로벌 운영체계(OS)의 표준으로 급부상한 데다 미국이 다국적 분업 생산 체계를 갖추면서 대응이 어려워졌다.”
-아베 정부의 양적완화 조치는 '잃어버린 20년'의 경험을 통해 얻은 학습효과인 것 같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는가
“일본 경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고령화로 인한 생산성 악화다. 경제성장으로 기대치는 높아졌고 스마트 기기와 자동차 등 물질적으로는 좋아졌는데 경제성장 정체로 소득이 제자리걸음 하면서 삶이 고달파졌다. 출산률이 높아지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출산이 줄면서 1인당 가용 자본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에 고임금으로 산업구조를 고급화 하면 어느 정도 소비가 줄어드는 걸 막을 수 있겠지만 너무 고급으로만 가면 수출에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결국 해외투자를 늘리고 고령화 시대에 가사도우미나 산업현장에서 역할을 할 로봇을 만드는 산업, 의료산업, 항공∙우주 산업 등 차세대 산업을 통해 돌파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기업 문화가 비효율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일본은 서구 문화와 아시아적인 가치를 조화시키며 성장해 왔다. 혹자는 ‘유교자본주의’라고도 하는데 이게 한계에 온 것 같다. 근무시간과 충성심이 비례한다고 보는 시각이 오랫동안 주류를 이뤘지만 낮에는 비실비실하다 밤에 일하면서 잔업수당을 챙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등 부작용도 컸다.
오래 일하는 것 보다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 물론 미국의 경우에도 소수의 엘리트들은 밤이 늦도록 일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본은 도요타의 시스템을 만든 사람이 고졸의 현장 기술자일 정도로 미국과 사회 구조가 다르다. 엘리트와 비엘리트 간의 격차가 적은 대신 다수가 늦게까지 일한다. 그게 일본의 장점이기도 해서 쉽게 바뀔지는 의문이다.”
-한일관계의 돌파구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일본 정부가 우경화로 치닫고 있지만 마스조에 요이치 도쿄도지사 같은 이는 합리적 성향의 인물인 만큼 서울과 도쿄라는 양국의 대표 지자체 간 교류를 통해 협력 물꼬를 트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박원순 서울시장과 마스조에 요이치 도쿄도지사는 지난 2월 3일 도쿄도청에서 만나 도시안전 강화와 저출산 문제 해결, 전염병 예방 등 6개 민생분야에 대한 교류협력을 공동으로 선언했다). 아베 정부가 지방 경제를 상대적으로 등한시 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만큼 양국간의 상호 이해 증진과 경제 협력을 위해 지자체 간의 협력을 늘릴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