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이하 한국 시각) '세기의 대결'로 기대를 모았던 플로이드 메이웨더(38·미국)와 매니 파퀴아오(37·필리핀)의 경기가 메이웨더의 싱거운 판정승으로 끝나자 오랜만에 복싱을 보기 위해 TV 앞에 모여든 국내 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화끈한 난타전을 보고 싶었던 팬들은 대신 메이웨더가 뒷걸음질치며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모습만 실컷 구경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복싱 마니아들이 꺼낸 이름이 '트리플 G(이름의 영어 앞글자를 딴 별명)'로 통하는 게나디 게나데비치 골로프킨(33·카자흐스탄)이었다. '골로프킨이었다면 이런 재미 없는 경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골로프킨을 설명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압도적인 전적이다. 32전 전승에 29KO승으로 KO율이 무려 90.6%에 달한다. 현 WBA(세계복싱협회)·IBO(국제복싱기구) 미들급(72.57㎏ 이하) 챔피언으로 최근엔 19연속 KO승 행진도 이어가고 있다. 그 중 12번이 3라운드 안에 끝낸 경기다. 미국 케이블채널 HBO의 복싱 캐스터 짐 램플리는 "골로프킨은 젊은 시절의 마이크 타이슨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골로프킨이 미국 국적의 선수였다면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 속에 거물급 프로모터를 만나 이미 1000만달러 이상의 대전료를 받는 스타가 됐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카자흐스탄 출신이란 한계로 미국 무대에서 이름을 알리는 데 시간이 걸렸던 그는 시원한 KO 행진으로 이제 미국 프로 복싱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 중 하나가 됐다.
최근엔 다른 기구의 챔피언이나 톱랭커들이 골로프킨과의 경기를 꺼려 오히려 매치를 잡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마빈 헤글러(61) 이후 최고의 미들급 복서라는 평가도 나온다.
프로 복싱이 침체에 빠진 지 오래된 한국 팬들에게도 골로프킨의 존재는 반갑다. 그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박씨가 한국계 카자흐스탄인이기 때문이다. 경북 포항 출신인 박씨는 카자흐스탄의 화학연구소에서 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년에 작고한 러시아인 아버지는 광부로 일했다고 한다.
'하프 코리안'인 골로프킨은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이며, 사람들은 친절했다"고 말했다. 그는 2002 부산아시안게임 때 처음 어머니 나라를 방문해 라이트미들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치와 불고기를 잘 먹는다는 골로프킨은 "어머니가 평소에 한국 얘기를 많이 해 주신다"며 "어머니를 생각하며 링에 오른다"고 했다.
골로프킨의 비극적인 가족사는 그를 강하게 만든 원동력이 됐다. 8살의 골로프킨을 복싱의 길로 이끈 두 친형은 모두 소련군에 입대해 전투를 치르다 사망했다. 골로프킨은 형들의 빈 자리를 복싱으로 달래며 무서운 선수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이란성 쌍둥이 동생인 막심이 좋은 자극이 됐다. 아마추어 무대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쌍둥이 형제는 2004 아테네올림픽을 앞둔 카자흐스탄 국가대표 선발전 결승에서 만나게 됐다. 하지만 어머니는 형제가 맞붙는 모습을 볼 수 없다며 대결을 만류했고, 결국 동생이 형에게 대표를 양보했다. 막심은 현재 형의 트레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강펀치의 인파이터로 미국에서 인기몰이를 시작한 골로프킨은 오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 잉글우드에서 윌리 먼로 주니어와 타이틀 방어전을 치른다. 골로프킨은 2010년 8월 WBA 미들급 타이틀을 따낸 뒤 13차례의 방어전을 모두 KO승으로 장식했다. 상대인 먼로는 19승(6KO) 1패의 전적을 가진 도전자로 헤글러와 세 차례 상대해 1승 2패를 기록한 윌리 먼로 시니어의 아들이다. 전문가들은 골로프킨의 KO승을 예상하고 있다.
골로프킨은 최근 메이웨더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는 "나와 메이웨더의 경기는 꿈의 대결이 될 것"이라며 "나는 영리한 챔피언을 상대로 진정한 싸움을 원한다"고 말했다. 지난 메이웨더―파퀴아오전을 해설한 황현철 한국권투위원회 이사는 "수퍼웰터급 챔피언 메이웨더가 6체급 석권을 원한다면 미들급 챔피언인 골로프킨과의 경기를 추진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