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맨해튼의 야경. 영화 ‘위플래쉬’의 주인공 앤드루는 이곳 링컨센터의 무대에 오르는 것이 꿈이다. 영화를 본 백영옥은 “앤드루를 링컨센터의 무대에 서게 한 것은 그에게 모독을 주면서까지 예술혼을 자극한 플레처 교수의 독설”이라고 했다.

"그 자신에게 글쓰기란 권투와 같다는 헤밍웨이의 글이 제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건강을 잘 돌보았지요. …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는 매 순간 작가는 절대적으로 제정신이어야 하며, 건강이 좋아야 합니다. 글 쓰는 행위는 희생이며, 경제적인 상황이나 감정적인 상태가 나쁘면 나쁠수록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낭만적인 개념의 글쓰기에 대해 저는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100년 동안의 고독'을 쓴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이 말은 불행이 예술가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든다는 전통적 생각을 뒤집는다. 물론 두 권 이상 장편소설을 써본 작가라면 헤밍웨이가 얘기한 '글쓰기는 권투'라는 말이 은유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

영화 '위플래쉬'의 음악학교 학생 주인공 앤드루가 드럼을 연습하다가 손가락이 터져 드럼 위로 피가 튀는 장면을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저 은유는 아니다. 영화의 제목인 '위플래쉬(whiplash)'는 학교의 빅밴드가 연주하는 재즈곡 제목이기도 하지만, 단어의 원래 뜻은 '채찍질'이다. 온몸에 채찍을 맞듯 연습에 매진하다 보면 인간의 연약한 육체는 찢어지고, 터지고, 베고, 피 흘리게 되어 있다.

뉴욕에 있는 셰이퍼 음악학교의 학생 앤드루는 학교의 1부 리그 빅밴드인 '스튜디오 밴드'에 들어가는 순간 새로운 목표가 생긴다. 전설적 색소폰 주자인 찰리 파커처럼 위대해지는 것이다. 찰리 파커는 꽤 능숙했던 색소폰 주자였던 자신을 '위대함에 이르게 한 것'은 한 공연에서 연주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드러머 조 존스가 던진 심벌즈 때문이라고 믿는다. 심각한 충격을 받은 찰리 파커는 사건이 일어난 날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바로 이를 악물고 연습에 매진한다. 이것이 전설적 재즈 뮤지션의 탄생 비화다.

앤드루는 찰리 파커의 전설을 숭배하는 학생이다. 평소 아들을 아끼던 아버지마저 "아무리 그래도 서른네 살에 약물로 비참하게 죽은 사람이 인생의 모델이 될 수는 없지 않니?"라고 말하지만, 그는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몰이해를 뒤로한 채 그저 연습에 매진한다.

'위플래쉬'는 철저히 예술의 '맨몸'에 대한 영화다. 예술의 몸이라고 말할 때 그 '몸'은 불가능한 완벽함에 다다르기 위해 '끝없이 단련되는 몸'을 뜻한다.

작가는 정확한 문장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수도 없이 고친다. 미국의 레이먼드 카버는 단편 하나에 서로 다른 수정본이 스무 가지 또는 서른 가지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더 인상적이다.

"수정본이 열 개나 열두 개 이하인 경우는 없습니다."

영화 '블랙 스완' 역시 완벽함에 다다르기 위한 발레리나의 악몽을 시적으로 보여주는데, 영화 속 니나도 정확한 동작을 위해 발이 뒤틀릴 정도로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화가는 자신이 생각한 정확한 색을 표현하기 위해 수천 번 붓질을 반복한다. 예술의 불행은 어쩌면 여기에 있다. 연습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언제나 예술가 자신이 원하는 완벽함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매일 하는 피나는 노력과 실패는 그들의 운명이 된다. 우울과 조울증, 공황 장애, 알코올중독, 강박 장애 등 유독 많은 정신 질환은 예술가들에겐 삶의 옵션이 아니다.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 역시 심각한 알코올중독자였다.

제2의 찰리 파커를 꿈꾸는 앤드루의 곁에는 예술 이외 모든 것은 부수적인 것일 뿐이라 믿는 테런스 플레처가 있다. 그는 제2의 찰리 파커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학생들에게 가하는 모욕은 물론이고, 거짓말까지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인간이다. 제자를 극한의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그의 학습법이 문제가 되어 그는 결국 학교를 그만둔다. 하지만 예술학교를 나온 나는 그런 선생의 존재가 어느 시절엔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의도된 상처를 정확한 방식으로 주는 선생의 존재란 예술가의 성장을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돈 안 되는 재즈를 왜 하나? 누가 보러 온다고 발레를 하나? 스마트폰만 펼쳐도 볼 것 천지인 세상에 누가 책을 만들고 글을 쓰나?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할 숙명을 지고도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 매달리는 일종의 질병 상태에 다다른다. 앤드루는 드럼을 치겠다고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교통사고를 당한 상태에서도 연주 시간을 지키려고 달려간다. 그는 광기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는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 드럼 치기를 멈춘다. 하지만 결국 앤드루를 깊은 침체기에서 건져내는 건 플레처 교수의 독설이고, 그를 누구나 서고 싶어 하는 링컨센터의 무대에 서게 하는 것도 그의 말이다.

"영어로 된 제일 몹쓸 말이 뭔 줄 알아? 바로 '굿 잡(good job·잘했어)'이야. 이 말 때문에 오늘날 재즈가 죽어가고 있는 거야."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앤드루가 한 공연은 그가 '굿 잡'을 넘어 어떻게 자신이 추구했던 완벽함에 이르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를 선생과 제자의 대립 구도로 본다면 마지막 장면은 언뜻 제자인 앤드루의 승리처럼 비칠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것은 예술의 육체성에 대한 헌사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앤드루의 마지막 드럼 연주를 통해, 이 영화가 어째서 예술의 몸에 대한 이야기인지, 흐르는 땀과 튀는 피를 통해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에는 지독한 고통이 따른다. 은유 하나 없이 다만 예술적 '팩트'만으로 그것에 대해 이토록 아름답게 서술한 영화는 오랜만이었다. 실제 무대가 아니었는데도 나도 모르게 극장에 앉아 손뼉을 치고 있었으니.

●위플래쉬―데이미언 셔젤 감독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