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신기한 광경이다. 80년대 후반 국민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던 추억의 코미디가 무대 위에 펼쳐지고 있는데 눈시울이 붉어진 관객들은 객석 곳곳에서 연신 눈물을 찍어낸다. 열연하는 이봉원의 전성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20대의 아들, 딸들은 부모님들의 낯선 눈물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한다. 객석을 웃기고 울렸던 공연이 마무리될 즈음 부모와 자녀들이 손을 꼭 잡고 따뜻한 눈빛으로 서로를 위로한다. 그런 관객들을 바라보는 이봉원의 눈가도 문득 시큰해진다. 3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연극으로 돌아온 이 보여주는 훈훈한 광경이다.

2월 27일 개막해 서울 행당동 소월아트홀에서 두 달가량 펼쳐지는 연극 은 영광의 시절을 함께했던 원년 멤버들이 다시 모여 향수를 자극한다. 과거 KBS '동작그만'을 썼던 최성호 작가가 극본을 집필하고 배우 겸 연출가 이근희가 프로듀싱을 맡았다. '메기' 이상운까지 함께하는 이 연극에 이봉원이 빠질 수 없었다. "당시에는 피부가 안 좋아서 '곰팽이'였는데 이젠 피부가 좋아져서 안 어울린다"면서도 중년을 위로하기 위해 '곰팽이'로 돌아온 이봉원은 가장 어울리는 옷을 입은 듯 무대에서 훨훨 날고 있다.

코미디프로 '동작그만'을 기억하시나요?
연극 은 코미디에서 시작한다. 다만 시계를 현재로 돌려 군대 내무반이 아닌 제대 후 현실을 살고 있는 주인공들의 30년 후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고문관이던 곰팽이는 기러기 아빠로 아내와 자식을 위해 고생했지만 냉담한 가족의 반응에 외로워하고, 사업 실패로 좌절한다. 자살까지 생각하던 찰나, 군대 고참을 잘못 만나 인생이 꼬였다는 생각에 이르고 복수를 위해 고참 '메기'와 '뺀질이'를 찾아 나선다.

"연출을 맡은 이근희 씨와 사회인 야구를 하면서 자주 만났고, 원작을 쓴 최성호 작가와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어요. 다시 한 번 뭉쳐서 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를 자주 나누던 찰나 좋은 기회가 생겨서 무대에 올리게 됐어요. 1년 정도 준비를 했죠. 무엇보다 중년들을 위한 연극, 중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원년 멤버들이 뭉칠 수 있었어요."

연극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이봉원은 2010년 에서 20년간 아들을 홀로 키운 아버지 정태준 역할을 통해 전국에 아버지 열풍을 일으키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연극무대에 익숙한 그이지만 1시간 40여 분의 공연을 이끌어가기란 쉽지 않다. 체력적인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등산을 통해 틈틈이 몸을 만들어왔다.

"대사 암기가 참 힘들더라고요. 그럴 때면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을 실감해요. 이 과거 고참들을 만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이 되는데, 회상 장면에서는 얼차려도 받아야 해요. 보약이 필요한 건 아닌지 고민까지 했어요."

이봉원은 1987년부터 그다음 해까지 '동작그만'에 출연하며 '곰팽이'라는 캐릭터로 사랑받았다. 당시 금기시됐던 군대를 소재로 한 '동작그만'은 폭넓은 시청자의 사랑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지금이야 이나 처럼 군대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많지만 당시에는 '동작그만'이 유일했죠. 보통 콩트 수명이 3~4개월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동작그만'은 2년을 넘게 장수했으니, 드라마로 치면 급의 프로그램이었던 셈이죠. 원년 멤버들이 무대에 오르는 것은 십수 년 만이지만 워낙 오래 한 작품이라 어제 한 것처럼 기억이 생생해요."

'동작그만'에 대한 생생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이봉원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40~50대의 중년 관객들이 추억을 간직한 채 소월아트홀을 찾고 있다. 촌스럽기까지 한 옛날 군복을 보며 추억에 젖어들고, 청춘의 시기 목청을 높여 불렀던 구전 군가들을 함께 부르며 그 시절을 추억한다.

"군대에 다시 가라면 갈 사람은 없어요. 그래도 누구에게나 과거는 애틋한 기억을 남기잖아요. 나의 군대 시절, 나의 20대를 생각하며 을 보러 오시는 관객분들이 많아요. 과거 '동작그만'이 선사했던 특유의 분위기를 그리워하는 분들도 있고요. 요즘의 공개 코미디는 속도감은 있지만 아무래도 인스턴트 느낌을 버릴 수가 없어요. '동작그만'이나 '회장님, 회장님'처럼 장수했던 코미디는 호흡이 길었기 때문에 기승전결이 있고, 웃음뿐 아니라 휴머니즘을 기본에 깔고 있었죠. 그래서 많은 관객들이 '동작그만'을 기억하고 연극 을 찾아주신다고 생각해요."

군대는 남성들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편견과 달리 의외로 여성 관객들의 반응이 좋다. 이 아버지의 삶을 전면에 내세우며 보편성을 확보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이 궁금증을 자극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지금까지도 군대라는 소재가 사랑받는 이유는 60만 대군을 고정 관객으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죠.(웃음) 가족 중 적어도 한 명은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거나 군대에 있는 사람, 군대에 갈 사람이죠.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아버지, 아들, 동생의 이야기로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전 국민이 궁금해하고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예요."

연극 이 반가운 이유는 예전의 얼굴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한동안 TV에서 보기 힘들었던 '메기' 이상운은 을 통해 처음으로 연극에 도전했다. 코미디 '동작그만'에서 '메기'는 말년 병장, '곰팽이'는 이등병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두 사람이 함께 콩트에 출연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호흡만큼은 그 어느 콤비 못지않다.

"제가 투입되고 얼마 후 '메기'는 제대를 했어요. 그래도 함께 을 하니 감회가 새롭죠. 코미디언들은 연극배우들보다 애드리브에 강하고 조금 더 유연한 측면이 있어요. 대본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대사를 잊거나 실수를 해도 유연하게 대처하고 반응하죠. 그래서 더 마음 놓고 무대에 오를 수 있어요. 호흡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이상운도 이봉원 칭찬에 여념이 없다. "극 중 곰팽이가 메기를 때리는 장면에서 감정을 실어 때리더라"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이봉원 덕분에 대기실에 간식거리가 떨어지지 않는다. 최근에는 후배들에게 소고기 회식을 시켜줬다. 연극배우들이 놀랄 정도로 후배들을 챙긴다"고 치켜세운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사이 몸을 풀던 후배를 향해 질펀하게 욕을 하면서도 "왜 오늘 회식 같이 안 가냐"고 묻는 그에게서는 특유의 끈끈한 정이 느껴진다.

소외받는 아버지들을 대변하다
은 코미디를 연극으로 변주하면서 아버지를 중심에 내세웠다. 영화 등을 통해 아버지가 주목받고 있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도 가장이자 아버지이기 때문에 소외받는 아버지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싶었던 까닭이다.

"연극 의 중심은 군대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할 수 있어요. 요즘은 아버지를 소재로 한 극과 영화가 많아졌지만 오랫동안 소외받아 왔잖아요. 자녀들도 어머니와는 살갑게 지내는데 유독 아버지를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버지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잘 표현하지 않으니 점점 가정에서 변방으로 밀려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아버지를 조명하자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어요. 아버지들의 속마음을 대신 전해주고 싶었죠."

'곰팽이'는 실패한 아버지로 등장한다. 자살 직전까지 가는 바닥 인생이다. 성공한 아버지도 많을 텐데 왜 굳이 실패한 아버지를 그리는 것일까. 이봉원은 '곰팽이'를 통해 성공한 소수가 아니라 어려움을 겪는 다수를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 안에는 이봉원의 모습도 담겨 있다. 이봉원은 방송을 통해 여러 번의 사업 실패담을 털어놓았다. 의 '곰팽이'라는 캐릭터가 혹여나 사업 실패라는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은 아닐지 걱정하자 유쾌한 대답이 돌아온다.

"다행히 이 연극 제작은 제가 안 했잖아요.(웃음) 제 사업 실패 경험들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열심히 노력한 결과였으니까요. '곰팽이'가 비록 실패한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그 자리에서 머무르지 않고 다시 성공을 향해 나아가요. 만약 성공한 인물로 그렸다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됐겠죠. 성공이 아닌 실패를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중년을 위해 만들어진 연극이지만 20대 관객도 많다. 부모님과 함께 공연장을 찾은 청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해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동작그만'이라는 코미디프로그램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청년들이 부모님 손을 잡고 찾아와요. 네티즌 리뷰를 찾아보면 재밌는 반응들이 많아요. 효도를 하려고 찾았는데 부모님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다는 글이 대부분이에요. 부모님 세대를 이해하게 됐다는 글도 많고요. 부모님들이 차마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대신해주고 싶어요. 세대 간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하는 거죠."

정작 이봉원은 무뚝뚝한 아들이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 손 한번 잡아본 적이 없다"는 이봉원은 동네 아주머니들에게는 재미있고 유쾌한 아이였지만 부모님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전히 무심한 아버지다. 대학교 2학년, 고등학교 3학년 딸과 아들에 대한 애정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지만 먼저 말을 걸고 살갑게 대하기는 쑥스럽기 그지없다.

"올해 고3이 된 아들은 대학교 떨어지면 군대를 가겠대요. 그래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자기 인생은 본인이 살아야죠. 아버지의 역할은 삶의 조력자라고 생각해요. 스스로 결정할 줄 알아야 더 건강히 자랄 수 있지 않을까요."

투박하게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봉원의 모습은 속 곰팽이와 닮아 있다. 아내 박미선과 아이들은 공연장을 찾아 아버지를 응원하고 갔다. 연극과 아버지의 모습을 어떻게 봤는지조차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아이들과 아내 박미선은 '곰팽이'를 통해 이봉원의 진심을 엿보지 않았을까.

"이렇게 오십 년을 살아왔는데 갑자기 바뀌면 애들도 놀랄걸요"라고 말하는 이봉원은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 그 자체다.

연이은 사업 실패? "도전하지 않는 삶 재미없다"
예능에 출연해 사업 실패담을 털어놓으며 '실패'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이봉원은 사실상 도전의 아이콘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나 같은 사람이 있어야 간판 장사들도 먹고 산다"고 농담을 하는 이봉원이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도전에 의의를 두기 때문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생, 그래서 이봉원은 여전히 청춘을 살고 있다.

"저는 지금도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어요. 도전하지 않으면 현상 유지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얻는 것도 없어요. 일단 시작을 해야 플러스든 마이너스든 결과를 얻을 수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이너스가 두려워 도전하지 않지만 걱정하기보다 도전을 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도전해야죠. 도전하지 않고 안주하는 삶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봉원이 젊게 사는 비결 중 하나는 스포츠다. 만능 스포츠맨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운동을 섭렵하고 있다. 2013년 MBC 를 통해 다이빙에 도전하기도 했던 그는 현재 연예인 야구단을 이끌고 있다.

"연예인 야구단 '스마일' 단장 겸 구단주 겸 감독이에요. 비록 경기는 뛰지 않지만 야구를 워낙 좋아해요. 한화 팬이에요. 보살이죠. 보살.(웃음) 그래도 경기장에서 운동하는 모습을 보며 에너지를 얻고 있어요."

이봉원 도전의 역사는 올해도 이어질 예정이다. 최근 KBS 2TV 에 아내 박미선과 함께 출연했던 이봉원은 집 안에 혼자 살림을 차릴 만큼 등산용품을 샀다는 사실을 공개해 웃음을 자아냈다. 박미선이 놀랄 정도로 등산용품을 산 이유는 단순히 욕심이나 수집을 위해서가 아니라, 히말라야 정복을 꿈꾸며 차근차근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도전은 그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미 히말라야 베이스캠프는 다녀왔어요. 올해는 전문 등반 코스로 올라가 히말라야를 정복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6,812m의 아마다블람이 목표예요. 원래 등산을 좋아해서 일주일에 두세 번씩 산을 탔어요. 지금은 에 매진하고 있어서 그 정도로 산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갑니다."

이봉원의 히말라야 정복은 막연한 꿈이 아니라 철저한 계획하에 준비 중이다. 트레이닝과 꾸준한 등산으로 몸을 만들고 있고 담배도 끊었다. 히말라야에 오르면 헬퍼들을 상대로 공연을 펼치겠다는 농담도 덧붙인다. 그만큼 지금은 이 그의 인생을 사로잡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잘되어서 지방 공연으로 확대하고 뮤지컬로도 선보이고 싶다는 소망이 있어요. 더 많은 사람이 을 통해 위로를 받고 희망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에서 곰팽이는 메기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새롭게 시작하는 중년 이등병'이라고 자신을 칭한다. 안 되면 되게 하는 군인정신으로 시작하자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응원한다. 이봉원도 100세 시대에 새로운 시작을 앞둔 수많은 중년 이등병들에게 응원의 말을 보내고 있다.

"실패할 수 있고, 노력해도 안 될 수도 있지만 도전해야죠. 하나씩 하다 보면 다 될 날이 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