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간 경마 도박에 빠졌었던 부평장(50.가명)씨가 "도박은 죽음과 바꿀 만큼 좋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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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달려!"
지난달 21일 경기도 과천시 서울경마장 실내 배팅장에는 마권을 든 사람 수천명이 모여 있었다. 등산복 차림으로 현금 뭉치를 들고 다니는 사람, 허름한 옷차림에 땅바닥에 앉아 경마 정보지를 보며 우승할 말을 추리하는 사람, 경마 방송을 뚫어져라 보며 욕설을 내뱉는 사람 등이다. 대부분 레저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이들중 한 때 경마 도박에 빠졌던 남자를 만났다. 지난달 말, 깡마른 체구에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두꺼운 점퍼를 입고 나타난 그는 자신을 부평장(50)이라는 가명으로 소개했다. 부씨는 “경마는 스포츠가 아닌 도박”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즐길 수 있는 스포츠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도박성이 강해 쉽게 빠져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씨는 1990년부터 2009년까지 19년 동안 경마에 빠져 산 도박중독자였다. 경마 때문에 두 번 이혼했고 두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그 사이 현금 5억 원 정도를 경마장에서 잃었고 집도 날렸다. 부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심각한 도박 중독자였던 씨의 이야기

나는 뼛속까지 심각한 경마 도박 중독자였다. 아니, 지금도 경마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
1990년 친한 선배의 권유로 처음 경마장에 갔다. 첫 경주에 5000 원을 배팅해 65만 원을 땄고, 그다음 만 원을 걸어 40만 원, 이어 10만 원으로 60만 원을 땄다. 그때 그렇게 쉽게 돈을 따지 않았었더라면 아마도 경마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지지리도 없는 놈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경마 도박 중독은 나를 나락으로 내몰았다. 딸 때보다 잃을 때가 많았고, 잃은 돈을 만회하려니 더 심각하게 경마에 빠져들고 말았다. 아마 도박 중독은 많은 돈을 땄을 때보다 감당할 수 없이 많은 돈을 잃었을 때 더 심해지는 것 같다.

"19년간 미친 사람처럼 살았다"

하루는 돈이 없어 친한 친구에게 500만 원이 들어있는 카드를 빌렸다. 그 카드에 들어있던 돈은 친구가 귀 수술을 하려고 모아둔 돈이다. 이 돈도 하루아침에 몽땅 잃었다. 나 때문에 친구는 한 참 후에 수술을 할 수 있었다. 도박에 빠지니 써야 할 돈, 쓰지 말아야 할 돈도 구분하지 못했다.
돈을 구하기 위해 경마 도박에 빠진 친구들과 도로에 있는 맨홀 뚜껑을 훔쳐 팔 생각도 해보고, 술에 취해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가정집에 들어가 돈을 훔칠 생각도 했다. 참, 미친 사람처럼 지냈다.

아내 생일날에도 나는 경마장에 있었다. 많은 돈을 잃고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그날 아내가 집을 나갔다.
그 뒤 나는 자살을 두 번 시도했다. 한 번은 바다에 몸을 던졌고, 또 한 번은 약을 먹었다. 그때마다 119구조대가 출동해 나를 살렸다.

그러나 나는 경마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경마는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쾌락이었다. 내가 선택한 말이 다른 말을 제치며 앞으로 달려나갈 때의 그 느낌은 지독한 쾌락이었다.
2005년 두 번째 결혼을 했지만 그녀 역시 경마 때문에 나를 떠나갔다.

경마 도박 중독은 초기와 중기, 말기로 나뉜다. 초기에는 단순히 경마가 재미있어서 가지만 결국 많은 돈을 잃는다. 중기에는 잃었던 돈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서 간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잃는다. 그러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 말기에는 내가 돈을 잃을 것을 알고도 그냥 간다. 죽음을 각오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009년 나는 어머니와 자식 둘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었다. 도박을 끊고자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한국 단도박모임’을 알게 되었다. 나와 같이 심각하게 빠진 도박 중독자들이 서로 만나 자신들의 고민을 털어놓으며 도박을 끊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는 모임이다. 나는 매일 이곳을 다니며 경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항암 치료 중에도 경마장을 찾았었다"

도박을 끊은 나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2014년 3월 식도암 2기 판정을 받았다. 암 수술을 하고 6번의 항암치료를 받았었다. 그 기간에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우연히 케이블TV에 나오는 경마 방송을 봤다. 갑자기 경마의 쾌락을 한 번 만 느낄 수 있으면 항암 치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서울경마장으로 향했다. 다만 배팅만은 하지 않으려고 참고 또 참았다. 암에 걸리고도 경마장을 다시 찾을 만큼 경마도박은 무서운 질병이다.

지금 도박에 빠져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난 아직 저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다’는 생각한다면, 절대 그러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당신들도 모르게 과거의 나처럼 미친 사람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