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호른(Horn·1921~1992)은 독일 출생의 미술가다. 그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광고 그림을 많이 그린 일러스트레이터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화가다. 카롤루스는 60세부터 기억력과 공간지남력 장애와 언어 장애 등 알츠하이머병 증세를 보였다. 이후 치매 증상이 점차 심해졌지만 그는 사망하기 바로 전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 결과 알츠하이머병에 따라 그림에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카롤루스가 60세 이후에 그린 그림을 연대기별로 거꾸로 배열하면 마치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점차 발전하는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아이들의 그림 그리기 능력 발전 과정에서 가장 나중에 완성되는 것이 원근법을 통한 정확한 입체감이다. 60세 이후 카롤루스의 그림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증상은 역설적으로 원근법의 오류와 소실이었다.
사람은 태어나 나이가 들수록 인지 기능이 자라면서 점차 발달하고, 최고 능력을 발휘한 후에는 노인이 되면서 기능이 감소한다. 정상적인 노화로도 기능 감소가 나타날 수 있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심하지는 않다. 그런데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질환으로 발생하는 인지 기능 저하는 '퇴행'이라 부른다. 사람이 태어나서 기능을 획득하는 과정의 역순(逆順)으로 증상이 진행된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세밀한 표현이 사라지고, 작은 장식이 반복되는 성향을 보였다. 전두엽 기능 장애로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보속증(保續症)의 발현으로 생각된다. 그림은 점차 단순해지고, 간혹 사람 얼굴이 동물 얼굴로 나타나거나 아이 얼굴이 노인 얼굴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림 속 모든 얼굴이 같아지고, 아이들 그림처럼 단순한 모양으로 바뀐다. 나중에는 내용을 알아볼 수 없는 낙서 형태 그림이 등장한다. 그리는 능력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대다수 화가나 예술가는 알츠하이머병 초기 단계에서 자신의 예술적 기술이나 능력이 감소했음을 느끼고 예술 활동을 스스로 그만둔다. 인지 기능 감소를 환자 자신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예술가는 인지 기능 저하를 느끼면서도 창작 활동을 계속하기도 하는데, 그것으로 예술가들이 겪은 질환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는다.
왜 어떤 화가들은 알츠하이머병으로 분노하고 좌절하면서도 그림 그리기를 계속할까. 아마도 이들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를 정말 좋아하고 즐겼던 것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