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진 특파원

지난달 28일 오후 독일 베를린 시내 중심인 미테 지구에 위치한 '더 팩토리 베를린'(이하 더 팩토리). 베를린 장벽 기념 공원에 펼쳐진 푸른 잔디 너머로 붉은 벽돌로 지은 5층짜리 공장형 빌딩이 눈에 띄었다.

이 건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자리 바로 옆에 있던 대형 맥주공장를 개조해 2013년 문을 열었다. 연면적 1만6000㎡(약 4840평)인 이 건물에는 트위터, 모질라, 사운드클라우드 같은 세계적인 IT 기업과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 25곳이 함께 입주해있다. 구글이 2012년부터 3년에 걸쳐 100만유로(약 11억9000만원)를 지원하기로 밝혀 화제를 모았던 더 팩토리는 신생 벤처와 대형 IT 업체가 서로 노하우를 공유하며 상생하는 공간이다. 매달 구직자를 위한 설명회와 신기술·제품 공개, 디지털 시장 동향 발표와 여성 벤처인 모임 같은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이날은 세계적인 전자업체 GE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3D프린터'와 '레이저 커팅기' 체험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날 아들(14)과 함께 찾아와 3D프린터로 부활절 계란 모형을 만든 토마스 하버캄(49·변호사)씨는 "더 팩토리는 독일 스타트업의 상징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여러 번 왔다"며 "IT 분야에 관심이 많은 아들과 새로운 기술을 쉽게 접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GE 관계자는 "지난 2주간 진행된 행사에서 하루 평균 300여명의 사람들이 몰렸다"며 "베를린은 최근 2~3년 사이 유럽에서 가장 떠오르는 스타트업 허브(hub)로 통한다"고 말했다.

영국 런던을 위협하는 스타트업 허브로 급부상

베를린은 독일의 정치적인 수도이지만 그간 뚜렷한 '산업·경제 기반'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엔 유럽의 실리콘밸리로 떠오르고 있다. 유럽 권역에서 '스타트업이 강한 도시'로는 영국 런던, 핀란드 헬싱키, 스웨덴 스톡홀름, 이스라엘 텔아비브 등이 꼽히지만, 이 중에서도 베를린은 최근 전문가들이 가장 주목하는 도시이다.

독일 베를린 중심가 슈타트미테 지역에 위치한 딜리버리히어로의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일에 열중하고 있다. 임대료와 생활 물가가 저렴한 베를린은 최근 영국 런던을 위협하는 스타트업 허브로 떠오르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매킨지(McKinsey)는 "2020년이면 베를린에서 새로운 스타트업 일자리 10만개가 창출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스타트업·벤처 캐피털 관계자와 국제 금융 전문가 등 100여명을 인터뷰한 결과 베를린이 '차세대 유럽을 이끌 스타트업 도시'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을 얻었다"고 밝혔다.

부동산 평가 포털인 라무디(Lamudi)에서도 최근 베를린의 스타트업 수가 5년 안에 영국 런던을 제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현재 약 4500여개에 달하는 영국 런던의 스타트업에 비하면 베를린 스타트업 수는 아직 절반 수준이다.

하지만 런던에 비해 생활 물가는 약 30%, 임대료는 무려 70%나 더 저렴해 각국의 젊은 예술가와 창업가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에 따라 패션, 음악, 음식, IT, 부동산, 자동차 등 전 분야의 스타트업이 움트고 있어 IT 분야에만 집중되어 있는 런던 스타트업보다 성장 가능성을 더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런 추세에 맞춰 독일 연방정부도 올해 초 독일 스타트업을 육성하기 위해 5억유로(약 5900억원)에 달하는 성장펀드를 운용하겠다는 세부 계획을 발표했다. 이르면 올해 안으로 개별 기업에 최고 4000만 유로를 투자하며, 신생 벤처에 투자하는 업체에 세제 혜택 등을 제공할 방침이다.

세계 각국의 젊은 인력 빨아들여

그렇다면 베를린 스타트업에서의 실제 생활은 어떨까? 독일 모바일앱 광고 관련 업체인 '앱리프트' 서울지사에서 일했던 신필수(29)씨는 작년 여름 베를린 본사로 직장을 옮겨왔다. 그는 "최근 본사 규모가 커지면서 새로운 스타트업 계열사를 만든다는 소식에 베를린으로 건너오게 됐다"고 말했다. 2012년 설립된 앱리프트는 서울뿐 아니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중국 베이징, 일본 도쿄, 인도 델리에 글로벌 사무소를 두고 있다.

신생 벤처와 유명 IT 기업 25곳이 입주해 있는 더 팩토리 베를린 전경.

신씨의 베를린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인종과 국적이 천차만별이다. 독일인뿐 아니라 미국·루마니아·러시아·이탈리아·헝가리·인도 등 각국에서 온 동료들 때문에 업무는 영어로 진행한다. 신씨는 "서울에서도 스타트업과 벤처가 모여 있는 테헤란로에서 근무했지만, 베를린에 와 보니 업무 속도가 훨씬 빠르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앱리프트의 팀 코스첼라 대표는 "잘 갖춰진 인프라와 높은 생활 수준에 비해 물가가 싸고, 젊고 역동적인 도시인 베를린에서 창업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계의 목소리도 있다. 직장 평가 사이트 '글래스도어'를 통해 베를린 스타트업 기업들을 검색해보면 부정적인 반응도 상당수 등장한다. 세계적인 IT 기업으로 발돋움한 일부 기업은 혹독한 업무 강도로 이직률이 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고, 신생 업체들의 경우 경험 부족 및 절차 무시로 각종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스타트업 거품이 조만간 붕괴할 것이라는 우려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JP모건의 리처드 메디건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올해 경제 전망을 통해 "과열되어 있던 스타트업 가치가 급락하면서 글로벌 증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