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8일. 여고생 A씨가 마포대교 위로 올라갔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서다. 다행히 투신 직전, 경찰에 발견됐다. 다음 날인 9일. 그는 또 마포대교에 올랐다. 또다시 그를 발견한 경찰. 채 피지도 못한 여고생이 무슨 사연 탓에 연이어 대교 위에 올랐을까.

경찰에 따르면 그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수년간 친부에게 성폭행을 당해왔다. 더욱 경악할 만한 건, 그의 친오빠 또한 그에게 손을 댄 것. 결국 둘은 3월 20일 입건됐다. 경기지방경찰청 성

폭력특별수사대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친족 관계에 의한 강간) 혐의로 친부(45세)를 구속하고, 오빠(17세)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부자(父子)는 경찰에서 범행을 시인했지만 서로가 A양을 성폭행 사실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A양은 현재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TV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김승주 씨(가명·31세). 결코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승주 씨 또한 초등학교 시절, 1년이 넘도록 성폭행을 당해왔기 때문이다. 엄마의 동생인 외삼촌으로부터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어렵게 '그때'의 이야기를 풀어놨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그는 여전히 아프다고 했다. 아직도 수면제, 정신분열증 약, 우울증 약을 달고 살 정도다.

11살 소녀, 23개월간의 악몽
원인 모를 병세에 시름시름 앓다, 작년에 비로소 알게 됐다. 11살. '뭣도 모를' 어린 나이에 1년 이상 당한 성폭행이 만병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20년 전인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촌이 결혼을 앞두고 저희 집에서 같이 산 적이 있어요." 외삼촌은 당시 27살. 승주 씨를 특히 예뻐했다. "같이 놀자면서 책상다리를 하고 저를 그 위에 앉혔어요. 그리고 동화책을 읽어주곤 했습니다."

처음엔 예쁘다고 쓰다듬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점점 도가 지나치다 느꼈다. "조카가 예뻐서 뽀뽀하는 것과 혀를 집어넣는 거는 다른 거잖아요. 간질이면서 속옷에 손을 넣고, 제 손을 자기 속옷에 넣기도 했고요."

그러다 결국 사달을 냈다. "부모님, 삼촌, 언니, 저 이렇게 5명이서 같이 살았거든요. 삼촌이 당시 통신설비 기사를 해서 근무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웠어요. 그래서 낮 시간에 집에 있는 경우가 많았죠. 부모님은 출근하시고, 언니는 학교에 있고요. 그때마다 저를 자기 방으로 불러서…."

승주 씨에 따르면 성추행은 거의 매일같이 있었고, 강간 또한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패턴이 그랬어요. 재밌는 거 하자면서 방으로 불러서 간질이고, 말을 타보라고 하고…. 그렇게 일을 치르고 나면 꼭 용돈을 줬어요. 그러고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죠."

그에 따르면 추행은 약 23개월 동안 지속됐다. 이후에는 없었다. "(삼촌이) 결혼했거든요. 그전까지 저희 집에서 같이 살았던 거니까, 결혼하면서 떨어지게 된거죠."

그러나 가족이기에 만남은 불가피했다. "경조사 때 가끔씩 봤어요. 벌레 보는 기분이 들었죠. 티는 못 냈지만요. 근데 그 사람(삼촌)은 저한테 아무렇지 않게 대하더라고요. 너무나 능청스럽게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때 일을 기억하고도 저러는 걸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증오심마저 들더군요."

삼촌은 결혼 이후 두 딸을 얻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두 딸은 벌써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됐다. 그는 승주 씨를 만날 때마다 두 딸 자랑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어느 날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승주 너 참 잘 컸구나. 나는 내 두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됐다. 너도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거라'라고요. 회개했다는 말투였어요."

20년 동안 숨겼던 이유
20년이 지나서 풀어놓은 이야기. 혹시 기억의 왜곡이 있는 건 아닌가 물었다. 승주 씨는 단호했다. 그는 "당시 삼촌이 무슨 옷을 입고 있었고, 내 옷은 뭐였는지, 삼촌의 성적인 발언과 말투, 행동, 표정까지 다 기억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긴 시간 동안 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을까. "그런 행동이 성폭행이라는 걸 인지한 게 고등학생 때였어요. 어릴 땐 불쾌하긴 해도 그게 뭔지 모르잖아요. 성교육 시간에 알게 됐는데 고민이 앞서더라고요. 그때도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터라 아,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하지, 얘길 하면 믿어줄까…. 누구에게 가장 먼저 얘기해야 되지, 엄마한테 얘기하면 동생 일이니까 곤경에 처할 것 같고…."

그렇게 다시 입을 다물게 됐고, 또 몇 년이 흘렀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시점에 마음 속 얘기가 불쑥 수면 위로 떠올랐다. 2년 전께다. 친언니 김승희 씨(가명)와 어딘가 다녀오던 길. "되게 아무렇지도 않게 툭하고 털어놨어요. 진지한 분위기도 아니었고요, 대낮이었어요. 그냥 무심한 말투로 갑자기 말했어요. '언니, 나 사실 어릴 때 외삼촌한테 성폭행당했다?' 이렇게요."

언니 승희 씨는 "그 얘길 듣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머리가 멍해졌다. 그때부터 동생을 붙잡고 차근차근 얘기해보라고 했다"면서 "내막을 알고 나니 기겁할 일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고 했다.

언니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얼마 후, 승주 씨는 응급실에 실려 갔다. 호흡곤란이었다. 평소 호흡곤란을 자주 호소했던 터였지만, 이때만큼은 제대로 검진을 받아보기로 했다. 언니의 제안이었다. 결국 지난 2014년 3월, 공황장애 및 트라우마 판정을 받았다. 원인은 과거에 입은 성적 피해. "18살 때부터 공황장애가 있었고, 발작도 있었어요. 근데 당시에는 정신적 아픔인지 몰랐어요.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니까 호흡기장애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거죠. 왜 아픈지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가족들의 반응, 2차 상처
진단 이후 약 1년간 치료를 꾸준히 받아왔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결국 부모님에게 진실을 얘기했다. 그런데 예상 밖이었다. 승주 씨는 "생각보다 적극적이진 않더라. 오히려 덮으려고 하는 분위기였다. 2차 상처가 됐다"고 했다.

"엄마가 첫째 딸이고, 밑에가 둘째 삼촌, 그다음이 이 삼촌이에요. 막내죠. 그래서 어릴 때부터 첫째인 엄마가 많이 챙겼어요. 엄마 딴엔 중립을 지킨 건데, 그게 또 상처가 되더라고요. 아빠는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라고 했고요." 승주 씨는 "내 편을 만들려고 밝힌 게 아니지 않으냐"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큰 삼촌 또한 비수를 꽂았다. "네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어차피 20년 전 일이니까 처벌할 수 없는 거 아니냐고요. 그냥 잊고 살라는 식으로요. 심지어 이제 와서 그걸 말하는 이유가 뭐냐. 혹시 (금전적으로) 원하는 게 있는 거 아니냐는 얘기까지 들었습니다." 승주 씨는 "성폭행을 당할 당시의 괴로움, 이후 트라우마, 그리고 이를 털어놨을 때 가족의 반응이 순차적으로 모두 상처를 남겼다"고 했다.

왠지 모를 오기가 생겼다. 지난 20년간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살았던 내 아픔은 무엇이며, 날 아프게 한 그는 왜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올 초, 삼촌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도 했다. "그때 나한테 그랬던 거 기억하느냐"고. 그랬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다 기억난다"는. 혐의를 모두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이미 공소시효(7년)는 지난 지 오래. 처벌할 길은 없었다.

"녹취 파일도 있어요. 기억난다고 말하는 내용이요. 왜 그랬느냐고 했더니, 제가 잘 버텨줄 줄 알았대요. 그게 말이 되나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걸 알고 나서는 저한테 사죄하는 문자메시지도 보냈어요. 그런데 그게 용서가… 되나요."

올 초 외삼촌이 모든 혐의를 인정하며 보내온 문자

두 아이의 엄마, 어떻게든 살아야
승주 씨는 25살에 결혼해, 슬하에 아들 둘을 뒀다.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생긴 이후엔 악착같이 살아보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녹록진 않다. "아직까지 정신이 자주 오락가락합니다. 그 사람 사진이라도 보게 되면 숨이 안 쉬어지고요. 그게 하루 종일 이어져 약을 먹고, 약에 취해서 자고 그래요."

남편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남편에겐 알리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계속 증상이 심각해지니까 병원에서 폐쇄병동 입원을 제안하더라고요. 아이를 키우는 입장인데 폐쇄병동에 입원하면 자리를 비워야 하잖아요. 심각하게 입원을 고민하던 차에 남편과 상의를 하다 털어놓게 됐습니다." 다행히 남편은 승주 씨를 감싸주는 편이다. "물론 이것 때문에 부부 사이에 갈등도 있죠. 잠자리를 가질 때 자꾸 생각나고 그러니까…."

최근 한 시사프로그램에서는 승주 씨의 사연을 보도하기도 했다. 방송에서 외삼촌은 "잠을 자다 잠버릇처럼 더듬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승주 씨는 이에 "방송 전엔 구구절절한 문자메시지를 통해 사죄하는 척하더니, 막상 그런 상황에선 태도가 돌변했다"면서 "'내가 죽으면 삼촌이 뼈저리게 반성을 하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직도 죽을 생각을 한다"고 했다.

성폭행 피해자는 평생 딜레마를 안고 살아간다. "피해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히 살면, 가해자는 반성을 안 하니까요. 반성 안 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라도 계속 아픈 채로 살아가는 것 같아요. 저도 멀쩡하게 살고 싶습니다."



금기어, '친족 성폭행'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된다. 그러나 친족 성폭행 건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지난 2014년 8월 기준, 최근 12년간 친족 성폭력 접수 건수는 총 3천6백73건이다. 2003년 1백87건에 비해 10년 후인 2013년에는 2.6배 증가한 4백94건이 접수됐다. 김승주 씨의 친언니 승희 씨는 "이번에 동생 일을 겪으며 봤더니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굉장히 많더라"고 했다. 승주 씨는 "자식을 가진 입장에서는 어릴 때부터 성교육을 시키는 게 필요할 것 같다"면서 "혹시나 그런 일이 있으면 엄마한테 즉각 표현하라고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비만의 심리학에 따르면 아동이 단시간 내에 갑자기 살이 찐다는 건 성적 피해의 징후일 수 있다"면서 "나 또한 6개월 이내에 몸무게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스트레스를 식욕으로 풀어서이기도 하지만, 가해자로부터 또 피해를 받을까 봐 살을 찌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들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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