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주필

일본의 봄은 사쿠라 꽃과 함께 온다지만 일본 샐러리맨들의 봄은 다르게 온다. 해마다 3월이면 회사마다 일제히 임금 인상률을 공개한다. 올해도 지난 18일이 그날이었다.

혼다자동차가 기본급을 3400엔 올린다고 하니 도요타는 4000엔 올리겠다고 나왔다. 닛산은 그보다 많은 5000엔 인상을 결정했다. 어느 조사를 보면 일본 기업의 절반 이상이 임금 인상률을 작년보다 높이겠다고 했다. 51%의 기업이 임금 인상 이유로 '종업원들의 사기를 올리려고'를 꼽았다. 2년 연속 축제의 봄이다.

'관제(官製) 임금 인상'이라고 비꼬는 보도도 있다. 아베 총리가 기업들에 여러 번 임금 인상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노조원들의 표정은 밝다. 연봉 인상을 못 하는 비정규직과 지방 중소기업 근로자에게 미안해하는 여유까지 보인다.

소비를 살리기 위해 임금 인상을 채근하기는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다. 야당도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자고 부채질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 반응은 일본과 정반대다. 기업 대표들이 최경환 부총리를 붙들고 임금을 올릴 수 없는 형편을 설득하다 못해 몇몇 경제단체는 최저임금 인상을 거부하는 공동성명까지 내려 했다. '결사(決死) 저항' 분위기다.

아베 정권은 박근혜 정권보다 겨우 두 달 앞서 출범했다. 아베는 처음부터 금리 인하, 금융완화, 재정 확대로 경기 살리기에 나섰다. 준비했다는 3개의 화살이 제대로 활공(滑空)한 것도 아니고 10점 표적을 맞힌 것도 아니다. 그런 결함에도 일본 경제는 신선한 바람을 맛보고 있다. 썩은 물이 빠지고 맑은 물이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애초 경제 민주화, 복지(福祉)를 앞세웠다. 그렇게 한참 달리다 보니 뭔가 허전했던가, 뒤늦게 경기 회복을 말하며 정부 지출을 확대하고 금리를 내렸다. 몹쓸 규제들을 단두대에 올리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경기가 피어나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정부의 임금 인상 압박에 기업들이 곧 쓰러질 듯한 표정으로 저항하려는 순간, 수사 대상이라는 기업들 명단이 튀어나온다. 기업인들은 종업원 사기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정권 눈치 보기에 고성능 센서를 가동해야 할 판이다. 이 땅의 벚꽃도 벌써 꽃망울을 내밀었건만 우리나라 샐러리맨들에게 봄이 쉽게 올 리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문재인 대표를 만나 경제를 걱정했다. 경제를 살리지 못하면 한(恨)이 될 것이라고 비장하게 말했다. 문 대표도 경제학 교과서 한 권만 달랑 가방에 넣고 등교한 학생처럼 호응했다. 두 정치 지도자는 자신들이 대한민국을 끌고가는 두 축(軸)이라는 신분을 망각했던가. 안보 걱정, 외교 걱정은 멀리했다. 메뉴판엔 중국도, 미국도, 일본도 없었다. 남북정상회담만 잠깐 거론했다.

최저임금도 올려야 하고 경기도 풀어야 한다. 하지만 경제란 오늘 풀리지 않으면 더 인내하며 내일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반면 외교 안보란 국가의 존망(存亡)이 걸린 절대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아무리 경제가 급하다고 해도 나라의 장래가 걸린 안보·외교 과목을 빼먹은 것을 국민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흔해 빠진 인사치레 같은 말은 생략하고 곧바로 계산서를 주고받는 거래를 하기로 작정했던 것일까.

대선 때도 그랬었다. 두 사람은 대선 출정(出征) 연설에서 세계 경제동향 점검에 건성이었다. 한국 경제는 세계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성장한다고 할 정도로 대외 의존도가 높다. 지금 세계는 돈을 풀어 이웃나라를 가난하게 만들면서 자기 나라만 살아야겠다는 심보로 통화전쟁을 벌이고 있다. 앞으로 몇 년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나라 밖 흐름까지 짚어가며 우리 경제가 위기인지 아닌지 다투었다면 국민은 두 지도자를 다시 보았을 것이다.

대통령과 여야 대표가 가장 역점을 두었다던 경제 관련 대화도 누구 말이 맞는지 다툰 것만 남았다. 대선 토론회 때 복지정책이 실현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말싸움하던 한 컷을 그대로 반복했다. 여기에 철부지 보좌진은 경제 실상을 깡그리 무시한 보도자료까지 발표했고, 반박이 반박을 낳으면서 말싸움을 키웠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던 지도자들의 만남은 결국 "저쪽은 틀리고, 내가 맞다"는 우김질로 끝났다. 많은 국민은 불황의 고통에 찌들어 있는데 말싸움에서 승리해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 경박함이란 아무리 정밀한 저울이라도 측정하기 힘들 것이다.

아베 총리를 다른 시각에서 보면 침략의 역사를 고치고 위안부 문제 같은 약점을 재포장하려고 경제 살리기에 몰두했다고 볼 수 있다. 취임하자마자 그토록 많은 엔화를 찍어낸 것도 일본 군대를 더 강하게 무장시키기 위해 먼저 민심을 탄탄하게 다지는 선행(先行) 투자였던 셈이다. 그는 3년 만에 집권 전에 가졌던 정치인으로서의 꿈을 거의 이루어가고 있다. 그런 아베가 얄밉도록 박근혜 대통령의 봄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