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남성복 카탈로그 어디에나 그의 얼굴이 등장했다. 175㎝의 키, 편안한 미소는 정장을 말쑥하게 소화하는 신사의 표본이었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던 가전제품 지면 광고에서는 최진실씨와 한복 차림으로, 배우 정우성과 함께 찍은 스포츠웨어 카탈로그에서는 운동복을 입고 시선을 모았다. 10여년간 도시 남성을 대표하던 양의식(50) 한국모델협회 회장은 "여전히 내 바탕은 충청도 산골 촌놈"이라고 말했다.
한국모델협회는 1976년 설립된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회원 8000명의 권익 증진이 목표다. 내달 22~24일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에서 열리는 제10회 아시아모델페스티벌은 20개국 모델들이 참여하는 행사로 양 회장이 첫 회부터 이끌어왔다. '촌놈'의 열정으로 아름다움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그를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부친이 원한 陸士 못 가, 자격지심이 나의 힘
충남 공주군 신풍면 동원리 130번지. 양 회장의 고향이다. 집은 딱 3채, 마을 가운데 샘이 하나 있어 참샘골이라 했다. 농사를 짓던 부친은 그에게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장군이 되어 나라에 봉사하라"고 했다. 그는 일찌감치 "시골을 떠나겠다"고 결심했다. "일하기가 싫었다. 나뭇짐을 해오면 부모들이 누구네 아들 짐이 더 큰지 순서를 매겼다. 체구가 작았던 나는 늘 꼴찌였다."
―어릴 때부터 도시에 가서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했나.
"나는 성공이나 꿈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릴 땐 위에는 메리야스, 아래에는 '다우다 빤쓰'(천막용으로 쓰는 뻣뻣한 천으로 만든 반바지),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365일 지냈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던 내게 희망을 준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었다. '넌 앞으로 큰일을 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도시에 가서 도전해보리라는 용기를 얻었다."
대전중앙고에 진학한 그는 한 달 2만원 사글세 방을 얻었다. 부친은 옷가지가 든 큰 보따리 하나와 김치통을 안겨주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성적이 부족해 육사에는 못 가고 전문대 회계학과에 진학했다. 적성에 안 맞아 방황하던 그에게 구두 가게 아저씨가 신문에 난 영화배우 선발 대회 광고를 보여줬다. 서울 장충동의 한 호텔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하려고 처음 서울 땅을 밟았다. 참가자 수백 명 중 2등으로 합격했다. 꿈은 쉽게도 이뤄지는구나 했다. 그러나 대회는 사기였다. 프로필 사진을 만드는 데 필요하다며 50만원을 받아간 주최 측은 연락이 끊겼다. 그 상태로 고향에 돌아갈 순 없었다. 그는 국도극장 옆 여관에 월세 10만원짜리 방을 얻었다. 서울 생활은 그렇게 울면서 시작했다.
―모델이 아니라 배우에 먼저 도전한 건가.
"땅 100평, 하늘 1000평을 마음에 품고 자랐지만 문화적 경험이 전무했다. 연기란 오래 쌓인 직간접 경험이 우러나야 하는데 나는 우려낼 것이 없었다. 그래서 연기를 해야 하는 배우보다는 몸의 언어가 중요한 모델 쪽으로 일찌감치 방향을 굳혔다."
모델 데뷔는 1984년 도투락 아이스크림 광고였다. 손창민과 김혜수가 주인공으로, 그는 웨이터로 나왔다. 스무 살인데도 중후해 보이던 얼굴이 도움이 됐다. "분위기와 표정에는 삶의 형태가 들어 있지 않나. 낯선 서울에서 촌놈이 느끼는 삶의 무게가 그대로 얼굴에 나타난 것 같다." 도투락 광고를 찍고 난 뒤엔 일감이 거의 없었다. 모델 에이전시 사무실에 찾아가도 말 한마디 걸어주는 사람 없어 혼자 몇 시간씩 앉아 있다 나오는 날이 이어졌다. 1년 반이 하릴없이 지나고 군대에 다녀오니 원점이었다.
크라운 맥주 광고가 그를 살렸다. 모멸감에 지쳐 있던 그는 촬영 당일 아침에 펑크를 낸 남자 모델의 대타로 광고에 투입됐다. "지금 불러서 가장 빨리 올 놈을 찾다 보니 내가 떠올랐다고 했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찍은 광고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여성 모델과 나란히 앉아 맥주잔을 기울이는 광고는 초겨울부터 5개월간 신문·잡지 등 모든 지면 매체에 들어갔다. 업계 사람들이 다 아는 광고가 되면서 그는 "썩 괜찮은 모델"로 알려졌다. 일이 쏟아졌다.
―그때부터 모델로 자리를 잡았나.
"일감이 밀려들었지만 긴장을 놓지 않았다.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땜빵'도 꾸준히 매달리고 쫓아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원들은 직장에 들어가고 최소 3년은 자기와 싸움을 치러야 하지 않나. 그 싸움에서 3만번은 이겨내야 대리가 된다. 프리랜서는 그보다 더한 싸움을 해야 한다. 하루에 100번, 1년에 10만번은 '나'를 이겨야 업계에 진입 정도 할 수 있다. 스타가 되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모델 일도 공부가 필요했을 텐데.
"백화점에 가서 모든 정장의 카탈로그를 수집해서 벽에 붙여놓고 포즈를 연습했다. 중요한 것은 캐스팅 담당자들이 더 이상 상상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프로필 사진을 보면서 '이 모델 머리에 물을 묻혀서 땀을 흘리게 하면 어떤 표정이 나올까'라고 상상할 필요가 없게 아예 그런 프로필 사진까지 준비해서 보여줘야 한다."
양 회장은 당시 삼성물산이 주력하던 신사복 빌트모아 모델로 의류 광고를 시작했다. 매력적인 회사원의 '얼굴'이 된 그는 삼성전자 휴대폰, 팩시밀리 광고 등 지면 광고 3000개, TV 광고 150개를 찍었다.
―1996년도에 은퇴했다. 광고 모델로는 이른 편이었는데.
"샘플 옷이 오면 내 키에 맞게 바짓단을 걷어 올려 테이프로 붙여야 하는데, 워낙 숙련된 일이라 눈 감고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바짓단 줄이기가 죽도록 싫어졌다. 화장할 때 얼굴에 닿는 스펀지도 못 참겠고. 여기가 끝이구나 싶어서 그만뒀다."
현업에서 물러난 그는 여의도에 모델 연기 아카데미를 열었다. "모델만 하다 보니 사람을 다루는 기초도 모르고, 네트워크도 없어 아랫사람 부리기가 어려웠다. 30대 초반에 또다시 태어나는 심정이었다. 다행히 그곳이 입시로 유명해지면서 자리를 잡았다."
'잘나가는 학원 사장님'이 된 그에게 평생의 한을 풀 문(門)이 다시 열린다. 1999년 전남 곡성 옥과면의 전남과학대에서 모델이벤트학과 겸임교수를 맡게 됐다. 한 달 강의료 80만원, 기름 값도 안 나온다며 아무도 맡지 않으려던 자리였다. 대학생을 가르치며 그도 대학생이 됐다. 호남대에 편입해 학사 학위 공부를 시작했다. 이어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를 마친 그는 호서대 벤처전문대학원에서 문화산업경영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델 출신으로는 첫 박사였다. 모델 활동의 기초를 담은 저서 '모델닷컴'은 모델계 교과서로 일컬어지며 여러 대학 교재로 쓰였다. 양 회장은 "국어에 서한샘, 수학에 홍성대, 모델로는 양의식이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들었다"고 말했다.
―무대에서 워킹하고 화보 찍는 모델에게 학벌이 왜 중요한가.
"뿌리 깊은 학벌 콤플렉스를 떨쳐버리고 싶었다. 전문대 졸업한 내가 '교수'를 하려니 학생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교수 하며 가르치고, 대학교를 다니고, 회사 운영하며 책도 썼다. 후배들에게도 늘 강조한다. 도약해야 한다고. 직업 모델은 자기를 세일즈하고 도전해야 살아남는다."
모델 페스티벌, 양방향 한류의 장으로
―아시아모델페스티벌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모델이 인정받을 긍정적이고 상징적인 행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6년 한국모델상 시상식으로 시작했는데, 전문 모델은 대중에게 덜 알려져 기업 후원이 어려웠다. 한류 스타와 패션을 결합해보자고 아이디어를 내서, 회원 3000명이 뽑은 '올해의 한류 스타상'을 제정했다. 차인표 장서희 등이 수상하며 주목도가 높아졌다. 3회 때부터 아시아모델페스티벌로 확대됐다."
―한류를 표방하는 행사는 한둘이 아닌데.
"한류 행사는 대부분 일방 소통이다. 해외에 가서 공연하고 돈을 벌어온다. 국내에서 홍보는 되겠으나, 해외 현지인들은 손해 봤다고 느끼는 일방적 한류에 그친다. 우리 것을 선보이고 팔면서 그 나라 사람들도 이득을 봤다고 느껴야 지속 가능해진다."
―10회째 대회를 주최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초창기에는 기업에 협찬을 받으러 가서 1만번 정도는 창피를 당했다. 면전에서 마주 앉아 당하는 거절은 둘째 문제다.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출입문까지 어떻게 걸어 나갈까였다. 뒤통수가 시리고 다리가 후들거려서 문까지 가는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이겨냈나.
"한번은 모 기업에 후원을 받으러 갔는데, 공교롭게도 그 기업이 세금 36억원을 추징당한 시점이었다. 하소연을 2시간 동안 묵묵히 듣고 나서 제가 살아온 얘기를 했더니 '올해 얼마 필요해?' 하며 협찬을 해줬다. 자신과 싸워서 이긴 결과라고나 할까."
―아시아모델페스티벌에선 미즈 모델, 어린이 모델도 뽑는다. 지나치게 상업적인 방향으로 가는 건 아닌가.
"얼굴에 볼살 넣고 성형한 주부는 안 뽑는다. 한국 주부의 보편적 아름다움을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겠나. 키즈 모델은 50명 뽑으면 50명 전원에게 상을 준다. 꿈을 갖고 관련 산업의 새싹이 되길 바라는 취지다."
―살면서 지켜온 원칙이 있다면?
"손바닥으로 하늘을 못 가린다는 것이다. 부탁할 거 있으면 당당하게 하고, 잘못한 게 있으면 시인해야 한다. 대회를 10년 하다 보니 5년 전 계획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게 있더라. 무조건 앞서가려고 안달복달해도 안 된다. 세월이라는 버스를 타고 자연스럽게 도착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