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와 고도성장을 경험한 40대 한국 작가의 사회 참여적 시선이 세계무대로 확장하고 있다. 지난 5일 아랍에미리트연방(UAE) 샤르자에서 개막한 제12회 '샤르자 비엔날레'에선 이주 노동, 여성 등 주변부를 담아낸 한국 작가의 작품이 낯선 중동으로까지 무대를 넓혀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이를 보여주는 두 한국 작가를 지난 6일 현장에서 만났다.
◇중동, 그리고 노동… 양혜규
샤르자 헤리티지 지구의 전통 가옥을 개조한 전시 공간. 산호와 진흙을 섞어 만든 건물을 배경으로 쌓아올린 벽돌 위에서 철제 배기구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저 멀리 모스크와 고층 아파트가 부조화의 스카이라인을 자아내며 그 모습을 무심히 쳐다본다.
베네치아 비엔날레(2009), 카셀 도쿠멘타(2012), 아트 바젤 '언리미티드'(2014) 등 세계적 미술 행사에 참여하며 동시대 한국 작가 중 최전선에 서 있는 작가 양혜규의 신작 'The Opaque Wind(불투명한 바람)'이다. 빨래건조대, 블라인드부터 짚까지 일상적인 소재를 사용했던 그가 이 낯선 땅에 들고 온 소재는 벽돌과 공장·창고 건물 옥상에 설치되는 철제 배기구다. 건설, 개발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재료다.
4년 전 같은 비엔날레에 초대됐지만 "지역에 대한 이해 없이 아무 데 가서 오줌 싸지르는 작품 내놓는 건 스스로 용납 못해" 전시를 거절했다는 완벽주의 작가다. 4년 만에 다시 얻은 기회에 이 '산업 부산물'을 그냥 들고 왔을 리 만무하다. 설치작은 1970~80년대 열사(熱沙)의 땅에서 일했던 우리 중동 근로자들을 위한 헌정 탑과도 같다.
양혜규는 "한국과 중동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중동 건설 노동자로 인해 근대화 역사를 공유한다. 그런데 한국에선 '돈만 벌어가면' 됐고, 중동에선 '지어지기만 하면' 됐다. 문화적으로 진정한 교류는 없었다. 그래서 서로 말하지 않는(unspoken) 역사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 지역을 연구하는 동안 작가의 예민한 눈에 한국 근로자를 대체한 동남아'이주 노동자'가 포착됐다. "80년대 우리의 아버지와 삼촌의 모습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작가는 1970~80년대 일간지 기사를 샅샅이 뒤졌다. '승리' '정복'의 시선으로 중동 진출을 바라본 기사 뒤편에 가려진 '이주 노동자'를 향한 착취, 희생을 봤다. 중동 근로자를 단초로 삼아 전 지구적으로 이뤄지는 이주 노동자 문제를 배기구를 통해 끄집어 냈다. 양혜규는 "이번 작품을 모작(母作·mother piece)으로 해서 한국과 중동의 역사를 다룬 작품을 꾸준히 할 생각"이라 했다.
◇여성, 그리고 전쟁… 임흥순
암흑 속에서 마주한 두 화면. 한쪽에선 베트남전을 겪은 할머니가, 반대쪽에선 이란·이라크전에서 아들을 잃은 여인이 절규한다. 전쟁이 관통한 여인의 삶. 영상을 보던 에티오피아 출신 큐레이터 메브락 타레케씨가 눈시울을 붉힌다. 조국에서 내전으로 희생된 여인들이 떠오른단다. 한국 작가 임흥순(46)이 이번에 출품한 영상작 '환생(Reincarnation)'이다.
"역사의 중심부에 있었던 남성은 희생과 절제에 익숙하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렇다. 내겐 주변부에서 객관적으로 세상을 보는 여성의 시선이 훨씬 편하다. 여성들이 지켜본 역사를 보여주고 싶다." 임흥순이 말했다. 금천예술공장 입주 작가로 주부들과 만든 '금천블루스', 여공들의 삶을 그린 '위로공단' 등을 통해 노동, 여성, 베트남 전쟁 등을 영상과 설치로 다뤄온 그다.
이웃, 여성,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가족에서 비롯됐다. 부모님은 노동자였다. 삶은 비루했지만 긍정을 가르쳐 주신 두 분이었다. 얼마 전까지 봉제 공장에 다녔던 어머니는 아들에게 "하고 싶은 건 다 하라"고 했다. 백화점 일용직으로도 일했던 여동생은 월급을 오빠의 학비에 보탰다. "내 어머니, 여동생의 희생은 우리 시절 여성들의 희생이라 생각한다. 여성들에 대한 작업은 그들의 희생에 대한 헌사이자 우리 삶의 기록이다."
마침 이날 그는 김아영(36), 남화연(36) 작가와 함께 올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 참여 한국 작가로 발표됐다. 주류 흐름에선 한 발짝 벗어나 국내에서 주로 활동해온 그의 베네치아 '입성' 자체가 미술계에선 화제다. "거대한 역사는 놓치는 작은 부분들이 있다. 쓸모없는 얘기일지도 모른다. 그 얘기를 주워담아 사회가 직면케 하는 것, 그게 내 역할인 것 같다." 한국 젊은 작가들의 분투(奮鬪)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