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에 테러를 가한 ‘우리마당 통일문화연구소’ 소장 김기종(55)씨에 대해 검찰 공안 관계자는 “오랫동안 통일운동, 종북(從北) 활동을 해왔지만, 공안당국도 주목하지 않던 인물”이라고 했다. 그는 “수차례 방북(訪北)했지만 당시 행적도 파악된 게 거의 없다. 앞으로 면밀히 확인해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안당국 관계자 말처럼 30년간 좌파단체들과 통일운동을 해 온 김씨의 이력(履歷)에 비해 검·경조차도 ‘사고뭉치’ 운동가로만 치부됐지 그다지 주목하지 않던 인물이었다. 55세 나이에도 미혼인 그가 미국 대사에게 테러라는 극단적 행동을 한데 대해 여러 해석이 나온다

김기종씨가 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리퍼트 주한미국대사를 습격한 뒤 연행되고 있다.

김씨는 리퍼트 대사 공격에 대해 전쟁 반대를 내세웠지만, 이는 스스로 만든 명분일 뿐 ‘외톨이’ 운동가의 돌출 행동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씨는 1980년대부터 풍물을 보급하는 단체를 세우는 등 문화·통일운동을 해왔지만, 주변에서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 서울 신촌에서 우리마당을 만들었고, 1998년 통일문화연구소를 만들었다. 이런저런 좌파 연합단체에 몸담던 김씨는 2006년에는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하자 독도로 본적을 옮기면서 ‘독도지킴이’를 만들어 통일운동과 결부시켰다. 하지만 당시에만 깜짝 관심을 받았을 뿐 기대와 달리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은 “김씨는 항상 우두머리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 단체 밑엔 못 들어가는 성미로 유명한 인물”이라며 “운동권 내에서도 별종으로 통한다”고 말했다.

이런 결과가 2007년 10월 분신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88년 ‘우리마당’ 사무실을 괴한 4명이 습격한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당시 노무현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분신해 1년 가까이 입원했다.

오랜 기간 통일·시민운동 활동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돌발 행동에 따른 주변의 무관심과 경제적 궁핍, 분신 이후 건강 악화는 이후 김씨를 더욱 극단적 행동으로 몰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10년 7월 ‘한·일 공동번영’ 일본 대사에게 시멘트 덩어리를 던진 혐의로 구속돼 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대해 김씨는 ‘우리마당’ 블로그에 “우리마당과 함께했던 인권단체가 외면하고, ‘독도’ 운동하는 단체들은 운동권이라 따돌린다”고 썼다.

지난해 1월 서울시청 행사장에서 박원순 시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유인물을 배포하려다 제지당하고 여러 차례 청사 진입을 시도하다 강제 퇴거했다. 한 달 뒤에는 신촌 연세로 대중교통 전용지구 지정을 앞두고 박 시장 참석한 설명회를 방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또 자신의 2007년 분신에 대해 무관심했던 시민단체에 대해 ‘배신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은 “김씨가 점점 폭력적이고 돌발적 행동으로 수차례 물의를 빚으면서 다른 활동가들과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5일 마크 리퍼트 주한미대사를 테러한 김기종씨가 지난달 24일 한미훈련을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한 모습.


그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사무실 월세도 밀릴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가족과도 수년간 교류가 없었다. 김씨의 친동생조차도 "(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며 "나는 물론 가족과도 교류를 안 한 지 오래됐다"고 했다. 동생 김씨는 2007년 김씨가 청와대 앞에서 분신을 시도해 전신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가 형과 닿은 마지막 연락이라고 했다.

그와 함께 시민운동을 한 인사는 김씨가 2007년 분신자살을 시도한 것을 언급하며, "분신 뒤에 몸에 이상이 온 것으로 알고 있다"며 "간질(발작) 증세를 가끔 보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