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무부의 웬디 셔먼 정무차관이 지난 27일(현지 시각) 워싱턴에서 열린 한 국제관계 세미나 기조연설에서 "(동아시아) 과거사는 한·중·일 3국 모두 책임이 있으니까 빨리 정리하고 북핵 같은 당면 현안에 치중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민족 감정은 악용될 수 있고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해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라며 "하지만 이런 도발은 발전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마비를 가져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에 대해서는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는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셔먼 차관은 이날 30분가량 '준비된 연설'을 했다. 그의 말이 과거사 문제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셔먼 차관은 1990년대 클린턴 정부에서 현 오바마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정권에서 줄곧 중용돼 온 외교 전문가다. 국무부 대북(對北)정책조정관도 지냈고, 나름대로 한반도 문제나 한·일 관계에 대해 식견을 갖춘 인물이다. 그런 셔먼 차관의 발언이라 이번 일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셔먼 차관은 이날 외교적으로 사용해선 안 될 부적절하기 짝이 없는 표현들을 거리낌 없이 썼다. 그가 말한 '값싼 박수를 받기 위해 민족 감정을 이용하는 도발'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한국 아니면 중국으로 짐작된다. 미국의 동맹국 지도자에 대한 무례이고 G2(주요 2개국) 파트너 중국에 대한 도발이다. 지금 상황은 아베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데 이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 재검증을 통해 담화 자체를 훼손한 데서 비롯됐다. 그런데도 한국과 중국을 거꾸로 먼저 도발한 쪽으로 몰아간 것이다.

20세기 전반 동북아에서 있었던 일은 셔먼 차관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칼에 정리되거나 덮어버릴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작년 4월 한국 방문 때 위안부 문제에 대해 "매우 끔찍하고 지독한 인권침해"라고 했다. 국무부 대변인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 측에 과거사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설 것을 주문해 왔다. 무엇이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인지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한국과 일본은 지난 2년 가까이 위안부 문제 등에서 미국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펼쳐 왔다. 미국 조야(朝野)는 물론 지방정부, 각종 연구소와 학계 등을 경쟁적으로 접촉했다. 정부는 그간 여기서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셔먼 차관의 발언을 보면 우리 정부 설명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한·미 관계도 정부 말처럼 최상(最上)이 아니라는 것도 이번에 드러났다. 정부는 이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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