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는 수료증도 학위 증서도 없다. 목회 현장을 떠난 지금도 필자는 '수업 중'이다."
박종순(75) 서울 충신교회 원로목사는 작은 체구에 표정도 온화하고 말씨도 조근조근 상대를 설득한다. 한눈에 '현명하고 합리적'이란 느낌이 드는 목회자다. 실제로 그의 목회 활동도 그랬다. 1976년 충신교회 담임으로 부임한 이래 한자리만 지켰다. 그사이 예장통합 총회장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을 지냈다. 그가 연합기구 대표를 맡고 있을 땐 시끄럽던 곳도 조용했고, 갈등도 표면화되지 않았다. 박 목사가 자신의 목회 활동 50년을 정리해 최근 '완주자의 노래'(쿰란출판사)를 펴냈다. '완주(完走)'라는 단어에서 자부심도 묻어난다.
그가 결혼한 1966년 무렵, 신랑감 선호 직업 순위에서 목사는 이발사 다음이었다고 한다. 그는 세 살 때 조사(助師·전도사)였던 아버지를 여의고, "너는 주의 종이 돼야 한다"는 어머니 기도 속에 성장해 결국 목회자가 됐다. 전도사 시절 '어린 종'이란 말이 콤플렉스여서 나이 들어 보이려 검정 양복, 도수 없는 뿔테 안경, 중절모까지 썼던 그가 '젊은 종'을 거쳐 이젠 '노(老)종'이 되기까지 직접 체득해온 '목회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 덕택에 책은 '목사 지침'이라기보다는 '리더십 교과서'로도 읽힌다.
지금은 서울 동부이촌동의 안정된 대형 교회이지만 박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할 무렵, 충신교회는 교회 건축을 둘러싼 문제 때문에 거의 두 쪽이 날 판이었다. 목포 양동제일교회에서 출발해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마중객은 단 2명. 교인은 100여명, 건축 대금 못 받은 빚쟁이가 몰려드는 주일 예배 분위기는 '한대(寒帶) 지방'이었다. 주변에서도 "왜 그런 교회로…" "힘들 거야" "고생깨나 하겠네" 같은 걱정뿐이었다.
그러나 박 목사는 하나씩 단추를 뀄다. 누가 누구를 비난해도 조용히 듣고 가슴에 묻었다. 6~7년 동안은 국내건 외국이건 출장을 가도 주일엔 돌아와 예배를 인도했다. 아파하는 양 떼가 치유되고 회복하길 기다렸다. 그리고 교회 차원의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교회는 차츰 안정됐고 그는 이곳에서 35년간 목회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박 목사는 몇 가지 원칙〈그래픽 참조〉을 정했다. 일기 쓰지 않기 등이 대표적이다. 처음엔 일기를 썼지만 어느새 '내가 가고 일기만 남았을 때 여기 등장하는 사람이나 자손들이 보면 어떨까' 싶어 집어치웠다. 마찬가지 이유로 설교에서도 실명(實名)은 되도록 거론 안 한다.
박 목사가 책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균형'이다. '인간관계'도 "엄격하고 신중한 자세를 취하면 '도도하다, 차갑다, 붙임성 없다, 인간미 없다, 사무적이다'라고 말하고, 반대로 매사 반겨 주고 말문을 열어 주면 '경솔하다, 가볍다, 수준 낮다, 신뢰하기 어렵다'라고 말한다. 목사의 경우 수다스럽고 경박하고 가벼운 쪽보다는 다소 차갑더라도 신중한 쪽이 좋다"고 말한다.
대부분 이야기는 부드러워도 "목자(牧者)는 양 떼 곁에 있어야 한다"는 권고는 단호하다. '양(羊)은 천사도 악마도 아니기 때문'이다. 바르게 이끌면 따라오고, 방치하면 온갖 위험에 노출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안식년도 안 갔다'는 대목은 과하다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나는 그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