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미국식 로펌(law firm·법률 회사) 사무실이 처음 설립된지 57년이 됐다. 법무법인, 법률사무소 등 변호사가 모여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로펌은 현대 경제사와 함께 성장했다. 조선비즈는 지난 60여년간 로펌의 변화를 1.0부터 4.0까지 구분해 5회에 걸쳐 조명한다.[편집주자]

서울 광화문에 미국식 법률사무소 이름에서 따온 ‘이&김’이란 영어 간판이 1958년 9월 등장했다. 국내 1호 로펌은 이태영, 김흥한 변호사가 시작했다. 김 변호사는 1953년 서울지법 판사였다. 그는 6.25 전쟁이 끝나기 직전 미국 유학을 떠났다. 김 변호사는 1958년 귀국해 이 변호사와 로펌을 만들었다. 1961년 5.16 군사 쿠테타가 일어난 직후 장대영 변호사가 합류하면서 법무법인 김∙장∙리가 탄생했다. 5.16 군사 쿠테타는 미국 변호사 자격증이 있는 김 변호사에게 기회였다. 군사정부가 경제개발 정책을 펼치면서 외국인 투자가 늘어 일감이 끊이지 않았다.

김·장·리는 국제거래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김·장·리는 1960년대 초부터 미국 걸프오일사를 비롯해 코카콜라, 웨스팅하우스, IBM, 체이스맨하탄은행 등 당시 포츈지(誌) 선정 500대 기업과 금융 기관에게 국내 투자와 영업에 필요한 법률서비스를 제공했다.

김∙장∙리 설립 주인공들은 모두 고인이 됐지만 법무법인 평산과 한차례 합병을 거쳐 법무법인 양헌으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평산은 김수창 변호사가 법무법인 한미(현 법무법인 광장)에서 2001년 독립해 설립한 금융전문 로펌이다.

아시아 최대 로펌으로 성장한 김앤장은 16년 뒤인 1973년 1월 서울 광화문 구세군 빌딩에서 문을 열었다. 김∙장∙리처럼 김앤장도 국제 변호사 사무실로 시작했다. 김앤장은 설립 초기부터 미국 로펌을 본따 대형화와 전문화를 꾀했다.

1977년 법무법인 광장이 뒤를 이었다. 광장은 대한항공을 설립한 고 조중훈 전 한진그룹 회장 사위인 이태희 변호사가 주축이 됐다. 이 변호사는 판사 출신이다. 그는 1976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이 변호사는 이듬해 서울 소공동 KAL빌딩에 광장의 모태가 되는 한미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산업은행·외환은행 등 국책 은행과 우량 기업을 중심으로 차관 도입이 봇물 터졌다. 조선업 발달로 선박금융, 수출금융, 중동 건설경기에 따른 해외 건설공사 계약, 건설금융 등 법률 서비스에도 로펌의 손이 필요했다. 당시 김앤장은 시티은행 고문을 맡으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1980년대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로펌이 대거 등장했다. 해외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미국 변호사의 일감이 늘었다. 이 바람을 타고 1980년 법무법인 남산이 등장했다. 남산에는 황주명, 신영무, 김평우 변호사 등이 설립 초기 활동했다. 황 변호사는 대법원 재판 연구관을 거쳐 대우그룹에서 상무이사를 지냈다.

그뒤 황 변호사는 법무법인 충정을, 신 변호사는 법무법인 세종을 설립했다. 신 변호사는 1983년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김평우 변호사와 신앤김이란 이름으로 독립했다. 세종로에 사무실이 있어 세종합동법률사무소로 개명했다.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 출신 김인섭 변호사가 1986년 12월 태평양합동법률사무소를 설립했다. 태평양은 다른 로펌과 달리 국내파가 다수였다. 유학파는 나중에 영입됐다. 태평양은 한국 경제 성장과 함께 기업 법무 수요가 증가하면서 기업 법무에 특화하는 전략을 세웠다.

1990년대 들어 부티크 펌(Boutique firm∙전문 로펌)이 등장한다. 중견 변호사들이 로펌에서 나와 소규모 법률 회사를 차리고 인수합병(M&A), 지적 소유권, 조세 등 세부 업무를 특화했다. 경제 성장 속도에 비해 로펌이 부족했으므로 이들은 호황을 누렸다.

신생 대형로펌도 탄생했다. 법무법인 충정은 1993년 5월 김장리에서 갈라져 나왔다. 조세 전문 우창록 변호사, 한만수 변호사 등은 1994년 9월 김앤장에서 나와 율촌(律村)을 설립했다.

1970년대 김앤장에서 일한 변호사는 “당시 업황이 좋아서 인권변호사들도 사흘 인권운동하고 이틀 일해도 먹고 살 수 있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