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아담 톰슨씨는 매일 밤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 보는 재미로 살았다. 케빈 스페이시 등 화려한 배우진에 권력 암투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스토리가 흥미진진했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해 2월 시즌2가 시작된다는 소식을 듣고 잔뜩 기대했다가 슬로비디오처럼 느린 화면에 크게 실망했다. 이 드라마는 인터넷으로 영화를 서비스하는 넷플릭스(Netflix)로만 볼 수 있는데, 인터넷 접속 속도가 평소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고객센터에는 톰슨씨 같은 가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고객센터는 "인터넷망을 제공하는 버라이존(Verizon)이 네트워크 속도를 고의로 느리게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 넷플릭스의 리드 헤이스팅스 최고 경영자(CEO)는 "버라이존이 회선 사용료를 더 받으려고 고의로 서비스 품질을 떨어뜨렸다"고 비판했다.

버라이존이 속도를 떨어뜨린 건 인터넷망을 넷플릭스 같은 동영상 서비스가 너무 많이 차지해 망이 혼잡해지고 다른 사용자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더 많이 쓰는 업체에 더 많은 돈을 거둬 그 돈으로 트래픽 급증에 대처하는 데 투자하는 게 뭐가 나쁘냐는 논리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인터넷의 근간을 이루는 차별 대우 금지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비판했다.

미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오는 26일 망중립을 강화하느냐를 두고 세기의 표결에 나선다. 결과에 따라 컴캐스트와 같은 인터넷 망 사업자와 망 위에서 콘텐츠를 제공하는 넷플릭스 같은 인터넷 기업의 이해득실이 극명하게 갈린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정치 운명도 걸려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망중립을 둘러싼 사회 논쟁이 커지자, 망 사업자를 더 규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승부수를 던졌다. 반대편인 공화당은 자유로운 경제 활동의 침해는 용납할 수 없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사진 왼쪽 위부터 반 시계 방향으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CEO, 브라이언 로버츠 컴캐스트 회장, 아짓 파이 공화당 의원(FCC 위원).

인터넷 판도를 바꿀 26일 표결

독자 여러분은 넷플릭스의 편을 들고 싶은가, 아니면 버라이존 편을 들고 싶은가? 선뜻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바로 최근 미국 IT 업계는 물론 백악관과 정가까지 들썩이게 하는 이른바 '망 중립성(net neutrality)' 전쟁의 한 단면이다.

망 중립성이란 인터넷 네트워크를 통해 전송되는 모든 트래픽을 그 내용, 유형, 제공 사업자 등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용어 설명 참조〉 이때 동등하게 대우하는 주체는 버라이존이나 AT&T 같은 인터넷망 사업자이고, 그 대상은 넷플릭스처럼 인터넷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콘텐츠, 애플리케이션 사업자 등 모든 사업자들이다. 또 '동등한 처리'란 특정 콘텐츠, 애플리케이션, 서비스에 대한 차단 금지(no blocking)와 차별 대우 금지를 말한다.

위의 사례에서 넷플릭스는 망 중립에 찬성하는 쪽이고, 버라이존은 반대하는 쪽이다. 그런데 두 회사의 다툼은 넷플릭스의 '항복'으로 다소 싱거워졌다. 넷플릭스가 버라이존에 돈을 더 내고 예전의 속도를 보장받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일종의 급행료를 낸 셈이다. 그러자 이번엔 경쟁사들이 반발했다. "왜 넷플릭스만 차별 대우해주느냐" "돈 있는 회사는 좋은 서비스 받아 더 좋아지고, 돈 없는 회사는 느려 터진 서비스 계속 쓰라는 것인가"라고. 리드 헤이스팅스 CEO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랬을 뿐"이라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다 강력한 망 중립 규제를 요청했다.

망 중립 전쟁은 단순히 두 산업 간의 이권 다툼이 아니다. 인터넷의 미래 지배 구조를 어떻게 짤 것이냐와 관련된 빅뱅과도 같다. 백악관과 의회까지 들썩이는 이유다. 오바마 대통령과 민주당, 연방통신위원회(FCC·한국의 방송통신위원회에 해당) 위원장은 망 중립 찬성파이고, 공화당과 연방통신위원회 일부 위원은 반대파이다.

망 중립이 뭔지 아직 이해가 어렵다면 비유로 설명해 보자. 넓지 않은 길이 하나 있다. 거기에 백화점 하나가 들어선다. 손님이 많아서 길이 복잡해지고, 기존에 다니던 행인들이 불편해진다. 도로 당국이 아이디어를 낸다. 백화점 전용으로 새로운 길을 하나 내고, 높은 통행료를 받겠다는 것이다. 백화점도 찬성한다. 그러자 다른 가게 상인들이 반발한다. 왜 특별 대우를 해주느냐고.

결국 넷플릭스의 사례나 백화점의 사례나 문제의 핵심은 정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쉽게 판단 내리기 어려운 이유다.

예를 들어 망 중립 원칙을 엄격히 적용한다면 인터넷망을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특별히 아끼지 않으려 하고 무절제하게 사용하는 '공유지의 비극'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망 중립 문제는 표현의 자유와도 관련돼 더욱 복잡하다. 망 사업자들에게 네트워크 혼잡 관리를 명분으로 사이트 차별을 허용한다면(넷플릭스에 그랬듯), 장차 인터넷에 오가는 콘텐츠의 내용까지 검열할 빌미를 준다는 것이다. 반대로 망 중립성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면 포르노나 스팸도 차단할 수 없게 된다.

그 어려운 판단을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이달 26일(현지 시각) 내려야 한다. 망 중립 원칙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수정할 것인가를 두고 세기의 표결을 벌이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인터넷망을 전화나 전기와 비슷한 공공재로 간주해 인터넷망 사업자를 유선전화 사업자나 전기 시설 사업자처럼 강력하게 규제하자고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인 FCC가 망 중립 원칙을 보다 강화한 새로운 규제 안을 마련해 위원들의 표결에 부치게 된 것이다. 위원은 5명인데 공화당 측 2명, 민주당 측 2명으로 돼 있으며 캐스팅 보트를 쥔 톰 휠러 위원장은 오바마 지지 의사를 밝혔다. 따라서 현재 구도대로라면 원안대로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 위의 사례에서는 넷플릭스 혹은 백화점 주변 상인들의 승리가 되는 셈이다.

이 표결은 전 세계 온라인 경제뿐만 아니라 사물인터넷 시대(IoT)의 패권 경쟁에까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인터넷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한국도 이 표결의 직접 영향권에 있다.

오바마, 망 중립 전쟁에 뛰어들다

지난 4일 FCC 톰 휠러 위원장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만난 뒤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모든 미국인에게 인터넷은 열려 있어야 한다"면서 망 중립 원칙 강화를 시사했다. 이 발표는 인터넷망 사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망 중립 전쟁에서 넷플릭스 같은 인터넷 콘텐츠 업체의 손을 들어주겠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5월만 해도 휠러 위원장은 망 사업자에게 '급행 회선(fast lane)'을 허용하는 망 중립 수정안을 발표해 버라이존 같은 인터넷망 사업자들의 로비스트가 아니냐는 비난을 한몸에 받은 장본인이었다. 급행 회선이 가능해지면 인터넷망 사업자들은 돈을 더 내는 업체에 속도가 빠른 망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휠러 위원장이 불과 8개월 만에 인터넷 콘텐츠 업체 편으로 돌아선 데는 오바마 대통령의 영향력이 결정적이었다. 지난해 11월 오바마 대통령은 2분짜리 동영상을 통해 망 사업자에 유리하게 기운 저울추를 반대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는 동영상에서 "인터넷은 미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고 삶에도 필수적"이라면서 "인터넷은 공공재로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에 앞서 지난해 초부터 백악관에 젊은 보좌관 2명이 중심이 된 비밀 팀을 꾸려 스타트업과 인터넷 기업, 인터넷 운동가들을 만나 망 중립 강화 여론과 논리를 수집하도록 했다.

미국에서 인터넷망 중립 전쟁이 처음 터진 것은 2007~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8년 미국 인터넷망 사업자 컴캐스트가 인터넷 파일 공유 업체인 비트토런트의 서비스를 차단하고, FCC가 이를 부당하다며 시정 명령을 내리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망 사업자와 콘텐츠 업자가 편을 나눠 대립했고, 지루한 법적 공방을 펼쳤다. 의회 로비전과 언론 홍보전이 이어지면서 미국 사회 전역에서 양측이 격돌했다.

세 가지 전선(戰線)

망 중립 전쟁의 전선(戰線)은 미국 경제계 곳곳에 퍼져 있다. 그중 핵심 전선 셋을 정리해 본다.

①FCC 對 인터넷망 사업자

역사적으로 볼 때 FCC는 망 중립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인터넷망 사업자가 특정 인터넷 업체의 서비스를 차단하거나 느리게 하면 규제하려고 했다. 반면 인터넷망 사업자는 FCC가 규제할 때마다 소송을 통해 규제를 무력화하려고 했다. 망 사업자들은 워싱턴에 한 해에 수백억원에 달하는 로비 자금을 뿌렸다.

FCC가 망 중립을 인터넷 산업을 관통하는 핵심 가치로 삼게 된 것은 유선 전화 시절 AT&T 의 독점에 따른 아픈 추억 때문이다. 팀 우(Tim Wu) 컬럼비아 법대 교수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AT&T가 전화사업을 독점해 새 상품 하나를 만들려 해도 AT&T 허가를 받아야 했다"면서 "유선 시대의 독점 현상을 인터넷 시대에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망 중립 원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2003년 발표한 논문은 FCC가 망 중립 원칙을 세우는 데 이론적 뒷받침이 됐다.

②거대 인터넷 기업 對 신생 인터넷 기업

망 중립 전쟁의 두 번째 전선은 거대 인터넷 기업과 신생 인터넷 기업 간 갈등이다. 미니 블로그 서비스인 텀블러의 창업자 데이비드 카프는 지난해 뉴욕 정치 기부금 행사에서 우연히 오바마 대통령 옆자리에 앉자 "망 중립이야말로 미국 기업가 정신의 온라인 토양"이라고 강조했다. 망 중립 원칙이 무너지면 스타트업이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을 때 통신업체들이 트래픽 혼잡을 핑계로 진입을 막거나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인터넷 쇼핑몰 업체 엣시의 채드 디커슨 CEO는 "우리 사이트 이용자의 9할이 여성이고, 대다수가 웹사이트에 물건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데, 망 중립이 훼손되면 이들의 생계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오바마 보좌관들에게 하소연했다. 한국의 벤처기업들도 같은 목소리다. 커플 메신저 앱 '비트윈'을 만든 박재욱 VCNC 대표는 "망 중립 원칙이 없었다면 우리가 쓰는 수많은 모바일 앱이 탄생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이미 거대 인터넷 사업자로 성장한 기업들의 속내는 다르다. 이 회사들은 얼마든지 돈을 더 낼 여력이 있다. 오히려 급행 회선이 가능하면 신규 진입자의 진입을 막을 수 있어 유리하다고 본다.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이 망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유다. 게다가 구글은 미국 전역에서 망을 사들여 통신사업까지 준비하고 있다.

③민주당 對 공화당

전통적으로 시장 자유 경쟁 정책을 지지하는 미국 공화당은 버라이존, 컴캐스트 등 인터넷망 사업자들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자 오바마 대통령이 분위기를 반전시킬 카드를 물색하다 망 중립 전쟁을 선택했다고 공화당은 보고 있다.

아짓 파이 공화당 의원(FCC 위원)은 휠러 FCC 위원장의 태도 변화와 관련, "현직 대통령이 중립 기관인 FCC에 부당하게 개입했다"고 주장하면서 "엄격하게 망 중립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사유재산권이 침해돼 혁신은 줄어들고 소송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공화당은 FCC가 무리하게 망 중립 원칙을 강화할 경우 FCC 권한 자체를 제한하는 법률안을 내겠다고 벼르고 있다. 조규조 미래창조과학부 통신정책국장은 "결국 망 투자 비용을 누가 합리적으로 부담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미국의 망 중립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것 같지 않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