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미국에 진출한 박찬호는 마운드가 아니라 라커룸에서 첫 시련을 겪었다. 동료 선수가 껌 종이를 던지며 "너한테 김치 냄새가 난다"고 조롱했다. 주먹다짐까지 벌인 박찬호는 이후 한 달간 한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김치 냄새를 없애고 서양 냄새를 몸에 배게 하려고 그가 선택한 음식은 치즈였다.

한국인이 "김치" 하며 사진을 찍을 때 "치즈" 하면서 찍는 그들, 유럽과 미국의 음식이던 치즈가 최근 한국 외식시장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라면이건 떡볶이건 갈비건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치즈에 찍어 먹고 감아 먹고 뿌려 먹고 돌려 먹는다. 일부 메뉴판의 조연이던 치즈 관련 음식들이 각자 주연으로 나서 간판을 내걸었다. 외식 시장에 일으킨 열풍을 타고 각 가정의 식탁으로 진군할 태세다.

치즈 등갈비는 모차렐라 치즈를 감아 먹는 재미가 있다. 매운 소스의 자극을 고소한 치즈가 누그러뜨린다.

치즈, 무조건 올려야 팔린다

치즈 등갈비, 치즈 족발, 치즈 장어, 치즈 닭발, 치즈 주꾸미, 치즈 곱창, 치즈 찜닭, 치즈맵닭, 치즈퐁닭…. 열거하기 숨이 찰 정도다. 외식계의 최강자들이 모두 치즈와 합병을 선언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치즈를 얹어 먹는 인기 음식은 치즈 떡볶이 정도였다. 그러나 작년 홍대 인근에서 '치즈 등갈비'가 지형도를 뒤흔들었다. 작년 5월 등장한 '제임스 치즈 등갈비' 홍대점은 오픈 시간인 낮 12시를 앞두고 11시부터 손님이 길게 줄을 섰다. 탁자 10개가 들어가는 60㎡(18평) 작은 점포의 하루 매출액이 1500만원이었다. 가맹사업을 시작한 지난해 8월 이후 석 달 만에 전국 100개 매장이 동시다발적으로 개업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치즈 등갈비는 크고 둥근 불판의 절반을 매운 등갈비, 절반을 고소한 치즈로 채운다. 서서히 녹는 치즈를 등갈비에 감아 돌려 먹는다. '제임스 치즈 등갈비' 운영 업체 이프유원트 측은 지난 3일 "고객 90%를 차지하는 18~28세 여성의 입소문 덕을 봤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2003년 오픈한 신림동 '함지박 치즈 등갈비'를 원조로 본다. 원래 매장명은 함지박매운불갈비. 흔한 갈비로는 경쟁력이 없다고 본 손정렬(32) 대표는 갈비를 등갈비로 바꾸고, 그가 좋아하는 치즈를 시험 삼아 내봤다. 의외로 반응이 좋자 아예 상호에 '치즈'를 넣고 대표 메뉴로 팔기 시작했다. 최근'원조'로 알려지면서 중국 손님도 찾아온다고 한다.

등갈비를 비롯한 치즈 결합 외식 메뉴의 인기는 한국인의 매운맛 사랑에서 출발했다. 일찍이 매운 음식의 인기를 증명한 불닭이나 닭갈비집에서는 얼얼한 혀를 다독여줄 메뉴가 마땅치 않았다. 기껏해야 누룽지가 가라앉히던 매운맛을 치즈가 진화(鎭火)하겠다고 나서자 대중이 두 손 들어 반긴 것이다. 쫄깃하고 고소한 맛이 매운맛을 누그러뜨리며 제법 어울린다고 좋아했다.

SNS 시대 빼어난'외모'로 소문 평정

먹기 좋고, 보기 좋다고 해도 사람이 몰리려면 촉매제가 있어야 한다. 음식 하나로 구름 인파를 모으는 데에는 SNS의 힘이 절대적이다. SNS로 확산되려면 이른바 사진발, 즉 외모가 중요하다. 시뻘건 소스를 뒤집어쓴 갈비가 뽀얀 치즈에 감겨 죽죽 늘어나는 사진은 SNS에 올리기에 최적이다. 화제가 발길을 부르고, 발길은 줄을 만들고, 줄이 다시 손님을 끌어들여 탁자 10개에서 한 달 1억원을 벌게 했다.

이 같은 열풍은 치즈를 어렸을 때부터 먹어온 2030세대가 주도했다. 치즈나 김치 같은 발효 음식은 입에 붙어야 한다. 치즈의 쿰쿰한 냄새를 '천국의 향'이라 하는 일부와 '썩은 걸레 냄새'라는 일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것은, 발효 음식에 대한 기호가 긴 시간 길들여진 입맛이라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매운맛도 좋아하고 치즈도 즐기는 젊은 세대가 기꺼이 유행에 부응하고 SNS를 탐색하면서 치즈 등갈비 인기가 생겨났다.

한국창업경제연구소 장정용 대표는 지난 4일 "등갈비 점포의 인기는 올해를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많던 홍초불닭집이 사라진 것은 모방 업체가 많아져서가 아니라, 불닭이 일반 호프집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는 안주로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 대표는 "불닭이나 등갈비처럼 조리가 쉬우면 일반 주점에서도 쉽게 따라 해 곧바로 안주 메뉴가 된다"며 "손님들이 굳이 전문점을 찾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국인 식탁으로 진격

치즈가 맛의 영토를 늘린 것은 급격하게 늘어난 치즈 소비와도 연관이 있다. 우유 소비량이 크게 줄어 낙농업계가 울상인데도, 치즈 소비는 전년 대비 10% 이상 늘었다는 것이 업계 추산이다. 국내 치즈 소비량은 2013년 10만t을 넘어서며, 10년 만에 2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래픽 참조〉

증가 속도도 매우 빠르다.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일본의 3분의 1에 못 미친 1인당 연간 치즈 소비량은 2013년 현재 일본 2.2㎏, 우리나라 2㎏로 비슷하다. 속도로 보면 우리가 2배 빠르다. 일본은 1987년 1㎏에서 2013년 2.2㎏로 26년 만에 2배로 됐다. 우리나라는 13년이 걸렸다.

유럽연합·미국과 맺은 자유무역협정(FTA)이 각각 2011년·2012년 발효되면서 외국산 치즈가 대량 수입된 것도 대중화에 견인차가 됐다. 가격 경쟁력이 생긴 외국산 치즈가 대형마트에 들어가면서 누구나 쉽게 사고 먹게 됐다.

치즈가 위용을 자랑하게 된 것은 불과 십수 년 사이의 현상이다. 1970년대만 해도 미군 부대를 통해 불법으로 유통되는 것이 전부였다. 미군 부대에서 나온 햄·소시지·치즈 '삼총사' 중, 총애를 얻은 것은 햄과 소시지였다. 고기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치즈는 고기도 아니면서 낯선 냄새를 풍기니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아이들 건강식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치즈 100g을 만드는 데 필요한 우유는 1L. 우유의 영양가가 10배로 농축된다. 유당분해효소가 부족해 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픈 유당불내증(乳糖不耐症)인 사람도 반가워했다. 치즈는 발효 중 유당이 거의 없어진다.

매운 소스로 버무린 치즈 주꾸미.

아이들에게만 먹이던 치즈는 1980년대 중반 피자가 대중화되면서 온 가족 스타로 떴다. 1985년 피자헛·피자인 등 프랜차이즈가 잇따라 개업하며 빠르게 퍼졌다. 1990년대 중반 시작돼 2000년대 초반 절정이던 와인 열풍은 다양한 치즈가 소개되는 계기였다. 강남에는 퐁듀 음식점이 서양 고급식으로 유행했다.

최근의 치즈 인기는 난공불락의 벽 하나를 깼다. 국민 음식인 라면 업계에서는 '치즈는 안 된다'는 것이 통설이다. 오뚜기가 4년 전 야심 차게 출시한 '치즈 라면'은 치즈 분말을 솔솔 뿌려 먹는 재미에 향까지 살렸으나 외면당했다. 권토중래라, 삼양식품은 지난달 기존 인기 제품인 '불닭볶음면'에 치즈를 첨가한 '스노윙치즈불닭'을 내놨다. 모차렐라 치즈 분말이 따로 들었고, 스프에도 첨가됐다. 가장 대중적인 음식인 라면에 치즈가 성공적으로 침투했다는 점에서 식생활 변화에 뚜렷한 변곡점으로 볼 수 있다.

치즈는 어느 음식에나 뿌려 먹는 전천후 양념으로도 변신했다. 지난해 치즈 매출이 직전 해에 비해 51% 증가한 편의점 CU는 지난달 라면·떡볶이·덮밥에 뿌려 먹는 분말 치즈 2종을 내놨다.

그간 국내에서 판매되지 않던 비살균 치즈도 수입될 예정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달 20일 수입을 허가하는 축산물 표시 기준 일부 개정고시안을 행정 예고했다. 2010년 "임신 중이면 리스테리아균으로 식중독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 것과 확연한 차이다. 리스테리아균은 비살균 치즈에 생길 수 있는 식중독균이다.

치즈 400종류가 사랑받는 프랑스에서는 '식탁의 성(聖) 삼위일체'로 바게트·와인·치즈를 꼽는다. 밥·된장찌개·김치로 삼위일체를 이루는 한국인의 식탁으로 치즈가 진군의 나팔을 울리며 진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