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은행 계좌가 '보이스피싱' 범죄에 이용됐다면 계좌 주인이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할까. 15일 대법원이 이에 대해 첫 판결을 내놨다. 결론은 계좌 주인이 자신의 계좌가 보이스피싱에 이용됐는지 몰랐다면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모(43)씨는 2011년 9월 9일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자신을 검사라고 밝힌 여성이 "당신 계좌가 사기 사건에 이용돼 확인이 필요하다. 불러주는 국민은행 계좌로 600만원을 송금하라"는 내용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이씨는 그가 불러준 국민은행 계좌로 600만원을 송금했다.

이씨가 600만원을 송금하기 하루 전. 김모(34)씨 역시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대출을 해줄 수 있으니 국민은행 통장과 현금카드, 비밀번호, 주민등록증 사본을 보내라는 것이다. 김씨도 보이스피싱 사기라는 사실을 모르고 순순히 통장 등을 건넸다.

한 은행 이용객이 은행에서 계좌이체 버튼을 누르자 전화금융사기에 대한 경고 문구가 화면에 크게 표시되고 있다.


이씨가 국민은행으로 600만원을 송금한 곳은 김씨 계좌였다. 이씨가 김씨 계좌로 송금한 600만원은 곧바로 누군가가 인출해 갔고 잔액 5000원만 남았다. 뒤늦게 보이스피싱 사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씨는 "김씨에게 속아 600만원을 송금했으니 돈을 돌려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김씨는 "나도 계좌를 도용당한 피해자"라며 맞섰다.
1심을 담당한 인천지법은 "김씨는 이씨에게 돈을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통장이나 현금카드를 양도하거나 양수하는 행위는 금지되는데도 김씨는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통장과 현금카드를 교부했고, 이는 보이스피싱 범죄에 사용될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는 이유였다. "김씨가 보이스피싱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통장과 현금카드를 교부해줘 범죄 행위를 용이하게 해 방조(幇助)한 책임이 있다"는 이유도 들었다. 다만 "이씨 역시 경솔하게 돈을 이체한 잘못이 있으니 두 사람이 책임은 50대50으로 김씨는 이씨에게 절반인 3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2심 결과는 달랐다. 인천지법 항소부는 "김씨가 통장을 준 것은 잘못이지만 김씨 역시 대출을 받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았고, 김씨가 어떠한 금전적 대가를 얻었다고도 볼 수 없다"며 "김씨가 보이스피싱에 사용될 것을 알면서도 통장 등을 건네 줬다고도 단정하기 어렵다"며 이씨에게 패소판결했다.
대법원도 항소심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대법원 3부(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김씨가 성명 불상자에게 자신의 통장과 현금카드를 교부할 당시 그 통장 등이 보이스피싱에 사용될 것이라는 점을 예견하면서도 줬다고 보기 어렵다"며 "설령 김씨에게 주의 의무 위반이 인정되더라도 김씨 계좌는 이미 이씨가 보이스피싱에 속은 뒤 재산을 처분하는 데 이용된 수단에 불과하다"며 이씨 상고를 기각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사회적으로 보이스피싱 폐해가 크지만, 대출을 받기 위해 통장을 준 것만으로는 통장 명의인에게 과실 방조에 의한 공동 불법행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첫 기준을 제시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약 김씨가 보이스피싱에 사용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통장을 건넸다면 불법 행위에 의한 책임을 부담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