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이 TV를 본다. 5000만명이 TV 전문가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그 말이 이렇게 실현될 줄은 몰랐다. TV 속 출연자가 아니라, TV를 보는 시청자들이 주인공인 프로그램이 나왔다. 소파에 누워 다리를 긁적이거나 베개 싸움을 하면서 TV 보는 시시껄렁한 모습마저 방송 소재가 되는 세상이 요지경처럼 느껴진다. KBS의 새 프로그램 ‘작정하고 본방(本放)사수’다. 10가구의 가족을 섭외해 그 집의 TV 앞(대개 거실이다)에 카메라를 설치한다. 출연자들은 뉴스부터 예능, 다큐멘터리 등 온갖 프로그램을 보면서 한마디씩 하는 걸 촬영해 방송하는 것이다. 개그맨 장동민이나 배우 김부선 등 연예인 가족을 끼워 넣어 보험(?)을 들었고, 외국인 유학생이나 친구들로 이뤄진 유사 가족도 있다. 신선한 콘셉트지만 ‘과연 이걸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앞선다. 다행히 선례가 있다. 이 프로그램은 영국에서 히트한 TV 프로그램 ‘가글(goggle·눈을 크게 뜨고 보다) 박스’의 포맷을 사온 것이다. 원작 홈페이지에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가족들이 TV를 보면서 나오는 반응의 차이를 보는 것이 제작 의도라고 한다. 그럴듯하다.
문제는 회수(淮水)를 건너온 귤이 과연 귤로 남을 것인가 탱자가 될 것인가이다. 시작은 과감했다. 경쟁사인 MBC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편을 보는 출연자들의 모습을 10분 가까이 보여준다. 1월 1일 '9시 뉴스'에 꼭 등장하는, 헬기에서 찍은 등산객 장면을 보면서 "작년 화면 재활용하는 것 아니냐"고 하는 말도 여과 없이 내보낸다. 솔직한 말을 얄밉게 하는 재주가 있는 개그맨 장동민은 '개그콘서트'를 보면서 중간에 재미없는 코너에 유명 배우가 게스트로 나오자 "원래 물 빠질 때쯤 초대손님이 나온다"라는 재치 있는 말을 해 웃음을 준다.
하지만 방송 시작한 지 20분쯤 지나면 슬슬 지겨움이 밀려온다. 방송을 보면서 즉흥적인 감상을 내뱉는 모습만 반복되는데, 이건 시청자 게시판의 글을 육성으로 옮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10가구나 나오는데 대부분 KBS 패키지 세트라도 신청한 것처럼 ‘비타민’ ‘영상실록’ ‘전국노래자랑’ 등 줄곧 KBS만 시청하고 있다. 출연자들에게 프로그램 리스트를 제시하고 의뢰한 티가 너무 난다. 김연아의 은메달 수상 모습을 보며 “나한텐 1등이었어”라고 말하는 뻔한 리액션을 굳이 집어넣은 것도 제작진이 관성을 벗어나지 못했단 방증이다. 실험인 만큼 일단 6회만 방영 예정인데 그것마저도 버겁게 보인다. 제작진이 더 다부지게 작정하지 않는다면 귤 대신 탱자만 먹게 생겼다.